경주는 주산(主山)이 없지만, 사방 넓은 평야에 여러 봉우리가 에워싸고, 특히 남쪽에 금오산(金鰲山)과 고위산(高位山)은 오랜 세월 동안 신라·고려·조선의 문화를 간직한 명승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문학적으로 금오산과 관련해 단편적인 시(詩)와 간접적인 글 언급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금오산을 직접 기술한 자료는 매우 적은 형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최씨 오연(烏淵) 최수(崔琇,1657~?)가 금오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유금오산록(遊金鰲山錄)」은 경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된다. 최수는 경주부 북쪽 모재리(慕齋里)에 태어났다. 고조 최을태(崔乙台)-증조 최응삼(崔應參)-조부 최협일(崔協一)-부친 최상업(崔尙嶪) 가계를 이루며, 경주손씨 손길(孫佶)의 따님과 혼인해 최석효(崔錫孝)·최석제(崔錫悌)·최석신(崔錫信) 등을 두었다. 저서로는 『오연유고(烏淵遺稿)』가 있으며, 후손 최계원(崔啓源)이 책자 2권을 가지고 성암(惺巖) 최세학(崔世鶴)에게 보여주었고, 1890년 3월에 최세학이 「서문」을 짓고, 같은 해 4월에 후손 최종일(崔鍾佾)이 「유사」 등을 지었다. 공의 6대조 참봉공(參奉公) 최영린(崔永嶙)은 효행으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조정에 추천하였고, 공의 문장 역시 효제(孝悌)의 중심에서 나왔다. 평생 저술한 것이 많았지만 대부분 유실되었고, 막내아들 지족당(知足堂) 최석신이 글을 모으고 엮어 초본을 만들었다. 최수는 1724년 3월, 경주 금오산에 올라 풍광을 읊조렸다. 장인어른과 지역인 16명 이상이 함께 등반하였고, 오가는 길목에서 또 다른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경주 중리에서 주씨 초당(草堂)을 시작으로 상서장, 포비암(布飛巖), 처용암(處容巖)=상사암(相思巖), 매월암(梅月菴), 산자암(産子巖) 등을 거쳐 금송정(琴松亭)에서 서쪽방향으로 우물이 있는 옛 절터를 지나 내려와 포석정으로 향하였다. 앞서 우와(寓窩) 이덕표(李德標,1664~1745)는 「수승록(搜勝錄)」을 통해 1704년 가을, 남산에 올라 상서장-남산산성-금송정-산신당-용장골-매월당-개선사 등을 유람하였고, 상서장을 시작으로 남산에 오르는 여정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오연유고(烏淵遺稿)』는 옥산서원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필자는 가을향기 맡으며 귀중한 자료를 열람하였다.유금오산록 - 최수 갑진년(1724) 중춘(仲春)에 빙군(聘君)께서 나에게 “그대는 남산을 유람하였는가?”라 묻기에, 나는 “못하였습니다”라 대답하였다. 또 “내 비록 옛사람처럼 되기를 기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옛사람처럼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자포자기에 달가워하는 자라면 진실로 비루할 것이다. 부 경계에서 최고 가깝고, 최고 수려한 곳 가운데 마땅히 남산만 한 곳이 없으니, 어찌 함께 가서 지난 숙원을 감상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마침내 말을 재촉해 길을 떠나셨다. 다음날 나 역시 일찍 일어나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이때가 봄 3월 좋은 시절로, 보리가 비로소 익어가고, 매화가 매우 좋을 때였다. 큰길을 따라 넓은 물줄기를 거슬러 갔다. … 산은 짙고 옅게 단장하고, 들판은 우아하게 꾸몄으며, 10리 강가는 봄빛이 일색이고, 봄날 주변의 꽃과 버드나무의 흥취를 따라 읊조리고 즐거웠다. … 이날 저녁 중리 주자장(朱子章) 집에서 투숙하였다. 초당(草堂)은 깨끗하고, 뜰은 향기가 진동하였다. 다음날 나는 말을 타고 상서장(上書庄)에 도착하였다. … 이곳은 최 학사 고운이 노닐던 곳으로, 고운이 떠나간 후로 대의 기초만 여전히 남아 있다. 대의 높이는 5, 6장이 되고, 대 아래에는 물이 휘감아 나갔다. 마침내 구불구불 남쪽으로 산을 따라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 몇 리쯤 가니, … 기이한 봉우리가 높이 우뚝 솟아 있어 점점 이름난 구역의 승경이 있음을 깨달았다. 여러 바위가 모인 것을 보면 가운데 큰 바위가 하나가 있었다. 서쪽은 산을 지고, 동쪽은 빼어난 구덩이가 있는데, 세속에 전하길 ‘포비암(布飛巖)’이라 하였지만,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 모르겠다. … 처용암(處容巖) 아래에서 쉬었다. 처용암의 크기는 수백 둘레로 그 높이는 7, 8장이 되었다[세속에 상사암(相思巖)이라 한다]. 절의 서북쪽은 바로 매월당 옛터로, 무너진 담장과 초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절의 남쪽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조금 맑은 경치가 있는 곳으로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게 에워쌌고, 오래된 탑의 기울어짐과 빛깔 역시 정자의 기이한 볼거리였다. 밥을 내어와 요기하고 술로 정담을 나눴는데, 소반의 햇고사리가 별미였다. 절의 북쪽에 매달린 듯한 벼랑과 절벽, 첩첩이 솟은 산은 기이하고 위태롭게 쌓여 감상할 만하였다. 어떤 것은 모난 것, 굽은 것, 오목한 것, 볼록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승려가 앉은 듯, 짐승이 달리는 듯, 말이 조아리는 듯, 개가 놀란 듯, 별이 흩어지는 듯, 주둔하여 지키는 듯, 높고 낮고, 크고 작은 것들이 괴이하여 마음을 즐겁게 또 기쁘게 하였다. 안개를 헤치고 구름을 밟으며, 구불구불 서쪽으로 산을 내려오는데 중간에 절 옛터가 하나 있었다. 그 곁에 우물이 하나 있었고, 일행 모두가 물을 떠서 갈증을 적셨는데, 맑기가 차가운 옥과 같았고, 맛은 신비한 약물 같았으니, 자주 물을 칭찬하며 “좋은 물이로다, 물이로다”하였다. 아마도 인간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