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옛 돌궐제국의 장수였던 톤유쿠크의 비문에 나오는 이 말은 교육혁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던 구절이다. 또 이 말은 당시 첨단산업의 주역이던 황창규 전 삼성반도체 사장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기도 하다.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적의 침입에 대비하지 않고 오만하게 굴던 돌궐은 채 2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에 곳곳에 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를 철저히 한 신라는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신라 때 구축된 경주 주위의 산성만도 이곳 명활성을 비롯하여 남산성, 도당토성, 관문산성, 주사산성, 선도산성, 서형산성, 양동토성 등이 있다. 당나라를 크게 중흥시켜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연 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임금으로 꼽히는 인물인데 하루는 그가 좌우 신하들에게 ‘창업(創業)과 수성(守城)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를 물었다. 재상 방현령(房玄齡)은 창업이 어렵다고 답했으나 또 다른 재상 위징(魏徵)은 생각이 달랐다. “예로부터 제왕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천하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생활에 빠져 천하를 잃는 예가 많습니다. 따라서 수성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톤유쿠크가 창업에 방점을 두었다면 신라는 위징의 생각과 같이 수성에 무게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명활산은 보문동과 천군동에 이르는 높이 245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신라인들이 신성시 하던 산이었다. 『삼국유사』「기이」편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신라 건국 이전 진한 사로국 시절에 6촌장 가운데 두 분이 명활산에서 탄강했거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배씨의 시조 지타는 하늘에서 명활산으로 내려왔다가 금산 가리촌으로 가서 그곳의 촌장이 됐다. 호진은 설씨의 시조인데 금강산으로 탄강했다가 이곳 명활산 고야촌에 자리를 잡았다. 명활산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사로국에서는 명산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기이」편 ‘진덕왕’조에 의하면 신라에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었다.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는데,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근래에 동쪽의 청송산이 명활산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국사기』「잡지」‘제사’조에는 입춘 뒤 해일(亥日)에 이곳 명활산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山不在高(산부재고) 산은 높지 않아도有仙則名(유선즉명)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고,水不在深(수부재심) 물이 깊지 않아도有龍則靈(유룡즉령) 용이 있으면 신령스럽다.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누실명(陋室銘)’의 첫 구절이다. 비록 명활산이 높지는 않았지만 신라인들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명산이다. 분황사 인근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에게는 명활산이 명월산(明月山)이었다. 보름달이 이 산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앞날이 보름달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었다. 정월 대보름에는 명활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필자에게는 명활산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이 ‘5할 쯤 나를 키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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