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가가 있었던 경주시 암곡동 명실리에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도 없지만 통일신라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창건된 ‘高仙寺’라는 아주 유서 깊고 멋진 가람이 있었다. 출가 및 낭지 스님과 관련된 반고사, 왕명에 의해 주석한 분황사, 판비량론 을 저술한 행명사, 여분오어(汝糞吾漁)의 설화가 서린 오어사, 그리고 삼국유사에 언급된 ‘뱀복이가 말을 않다’(蛇福不言)와 ‘원효가 굴레에 매이지 않다’(元曉不羈) 등 고기가 점철된 고선사는 원효대사의 행적과 관계 깊은 사찰이다. 고선사는 서기988년 중국 송나라 때 ‘찬영’이 지은 <송고승전> 원효편에 기술되어 있는 고찰로 원효대사가 57세부터 70세(686년) 영원한 대야(大夜)에 드실 때까지 계셨고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오래 한곳에 머물렀던 곳이다. 왕의 원찰로 경주 박물관 동쪽 뒷뜰에 고선사지의 서당화상탑비가 꽂혀있던 귀부의 귀갑문을 특수카메라로 확대해보면 임금 王자가 새겨져 있다. 열반지인 혈사(穴寺) 즉 움막절(구멍절,동굴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고선사지는 1975년 덕동댐 수몰 직전에 충남대학교 고적조사팀이 발굴했고 그 보고서는 충남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는데, 통일신라의 전형적 1금당 2탑 형식이 아닌 1금당 1탑 형식의 산지가람 형이다. 옛 고선사지터는 명실리에서 시릿골로 넘어가는 도로가에서 큰거랑 건너 ‘수리웅디’를 지나 논 가운데 위치하고, 절터 뒤쪽은 산비알이 이웃해 있었다. 이 고선사지에는 장대미려한 국보 제 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저 유명한 <고선사서당화상탑비>가 고정되었던 보무늠름한 귀부, 담소유려한 디자인의 금당계단 소맷돌이 있었다. 고선사터 석탑, 귀부, 폐사지 석재, 금당지 소맷돌 등 수많은 석재유구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동쪽 뒷뜨락에 옮겨져 있다. 탑의 사리공내 보물들은 1940년경 일제에 의해 도굴반출되어 지금 일본 어딘가에 있겠지만 구체적으론 알 길이 없다. 고선사지 귀부비갈 받침돌에는 서기 800년 초 당시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삼촌이자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던 각간 ‘김언승’(훗날 신라 제41대 헌덕왕이 됨)이 원효대사를 대대적으로 기리며 조성한 세기적 기념비인 고선사서당화상탑비(高仙寺誓幢和尙塔碑)가 꽂혀 있었고, 이 탑비 조각이 1915년 일제의 금석문 수집조사에서 우연히 고선사 옛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사서에 없는 진귀한 주옥같은 자료들이 전한다. 8세기 백제 도래인들이 일본 교토에 코잔지(高山寺)를 짓고, 13세기 초[1206년] 가마쿠라 막부시대에 원효대사를 깊이 흠모한 ‘묘에 스님’이 이 코잔지를 크게 개수 중창했는데 절 이름도 내고향 암곡 명실리 <高仙寺> 사명 중에서 중간자 ‘신선 선’에서 ‘사람 인’ 변을 빼 <高山寺>로 하였다. 또한 묘에는 일본인 ‘오오따니’로 하여금 원효대사와 의상조사의 일대기와 행장을 30여 폭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남기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화엄종조사회전’, 일명 화엄연기이다. 1편에 의상대사, 2편에 원효대사의 행장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 현존하는 가장 오랜 고선대사 원효의 진영이 남아 있다. 원래 원효대사의 진용은 분황사에, 소상은 고선사에 모셔져 있었다. 이를 통해 묘에 스님이 얼마나 고선대사 원효를 흠모하고 존경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이에 일본 ‘고토바 천황’은 묘에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고잔지에 특별히 <高山寺> 칙액을 하사했다. 남의 나라 코잔지에 원효대성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추앙과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정작 내고향 암곡 명실리 덕동댐 물밑 옛 高仙寺 주변에는 추모의 발길은커녕 표지석 하나 없으니 그 언제 그 어느 인연으로 고선사를 복원해 고선대사 해동교주 원효보살의 진영과 소상을 모시고 추모의 제를 다시 올릴까! 한자 한자 자구마다 용처럼 꿈틀대는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한 주옥같은 명저들을 그 언제 주장자로 치고 일갈하며 강설의 사자후를 토해 볼 꺼나! 일연스님은 원효대사를 크게 기려 삼국유사에 유일하게 고선사가 있었던 내 고향 암곡 한 산골짜기에 대해 <원효불기조>, <사복불언조>, <무장사미타전조> 등 세 편의 고기를 남기셨다. 경주 사람들이 이처럼 위대한 원효대사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이 글을 통해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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