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이씨 몽암(蒙庵) 이채(李埰,1616~1684)는 양좌동 안계리(安溪里)에 살면서 꽃을 가꾸고 후학양성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어려서 종조부 설천(雪川) 이의활(李宜活,1573~1627)에게 수학하였고, 1666년 늦은 나이 50세에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행장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면 번번이 귀를 막고는 “내가 젊어서 어버이 봉양을 위해 과거에 응시해서 벼슬을 구한 지가 40여년이다.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고생하면서 뜻을 얻지 못하는 것이 명(命)이 아니겠는가. 어찌 괴롭게 60세 나이에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면서 마음을 어기고 뜻을 거스르는 수치를 거듭 범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고, 1676년 영릉참봉(寧陵參奉)과 1677년 빙고별검(氷庫別檢)에 등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1629~1670) 등과 함께 동경잡기(東京雜記)를 편찬하고, 울산지역을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전하였다. 회재 선생의 후손인 몽암은 선조의 자취를 더듬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옥산의 북쪽에 있는 도덕산에 올랐다.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은 옥산을 찾아 사방을 돌아보고는 앞에 삐죽삐죽 솟은 화개산, 뒤에 우뚝하게 자리한 도덕산 그리고 시내가 그 사이로 흐르고, 시내 앞 정자는 암대(巖臺)와 가지런하고, 소나무와 대나무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물소리가 맑고 시원하게 들렸다고 묘사하였다. 1643년 몽암은 옥산서원 앞 세심대(洗心臺)에서 출발해 두덕암(斗德庵)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 두덕암은 회재가 정혜사에 머물 때 도덕암으로 고쳐 불렀고, 임진왜란 때는 향교 대성전의 위패(位牌)를 임시로 봉안하고, 삼국유사 원본을 보관한 적도 있는 곳으로, 선대의 유업과 지방 유림의 자취가 서린 공간이다. 게다가 도덕산을 두루 유람하고 「유도덕산록(遊道德山錄)」 기록을 통해 험준한 도덕산을 오르내리며 학문의 수련과 고된 등산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선조인 회재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학자 자신의 심신을 단련하며 천기(天機)의 방도를 얻었다. 이외에도 낙곡(樂谷) 이질(李耋,1783~1854)의 「도덕산기」, 묵헌(黙軒) 이태수(李泰壽,1799~1857)의 「유도덕산기」, 춘포(春圃) 이병태(李秉泰,1915~1990)의 「도덕산기」․「유도덕암기」 등 후대의 등반기록이 다수 전한다.유도덕산록(遊道德山錄) - 몽암 이채 영남지방은 동도(東都)의 옛 성(城)이고, 동도의 오래된 이름으로, 산수의 고장이다. 여러 산은 태백산을 조종(祖宗)으로 하고, 청량산에서 갈라져 용이 서린 듯 범이 웅크린 듯 구불구불 드넓게 경상도 여러 고을을 둘러싼다. 그 갈라진 줄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주왕산·내연산·보현산·팔공산·운문산이 되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비학산·무학산·도음산·도덕산이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출중하고 오직 도덕산이 여러 봉우리에서 모여 크게 이룬다. 을해년(1635) 봄에 마침 원우(院宇)에 도착하였고, 동지와 몇몇 사람과 함께 지팡이 짚고 올라 나란히 두덕암(斗德庵)에 도착하였으나, 날이 이미 저물어 두루 관람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괜스레 슬피 보낸 세월이 이에 10년이었다. 금년 여름 4월에 함께 절에 들어가 독서하자고 여러 벗에게 요구하였다. 나는 여러 친구에게 고하여 말하길 “무릇 인간이 마음을 확장시키고 문장에 도움이 되며, 심지(心地)를 넓히고 도덕을 갖추는 데에는 천하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승경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옛날 우리 부자(夫子:공자)께서 태산(泰山)을 유람한 것이 오래되었고, 마치 사마천(司馬遷)의 무리가 일찍이 용문(龍門)을 오르고, 검각(劒閣)을 찾아서 그 유람을 장렬히 한 것은 논할 것도 없다. 우리도 어찌 또한 천년 아래에서 기이한 유람을 뒤따르고, 옛사람이 이르렀던 지역을 찾아가지 않겠는가? 다행히 지금 이 산의 형승이 동도(東都)에서 제일이고, 산 높고 험한 기이함은 태산(泰山)의 용문(龍門)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니, 이 또한 동토(東土)의 하나의 큰 기이한 풍경이다. 이미 저곳에서 보기를 추구하기 어려우니, 이곳에서 두루 유람하기를 바라면서 그 뜻을 기리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라 하니,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길 여기에서 저기까지 오르내리는 어려움이 전에 겪었던 것보다 백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 어찌 오르는 것은 어렵고, 내려오는 것은 쉬운가? 오르는 것은 힘들고, 내려오는 것은 편하니, 이 또한 우리가 공부하는 것과 비유할 수 있다. 대체로 이 산이 도덕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 어찌 우연일 뿐이겠는가. 산신이 이름 붙인 것도 아니고, 세상 사람이 이름 붙인 것도 아니며, 또한 회재 선생이 이름 붙인 것도 아니니, 조물주가 그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겠는가? 신라, 고려 이래로 초연(超然)히 구름 낀 골짝에서 은거하는 사람을 어찌 한정 짓겠는가? 천지가 비밀스레 숨겨두고, 귀신이 보호하고 감추어 마침내 우리 선생을 기다림이 있었으니, 아마도 사람은 각각 주인 되는 곳이 있고, 물건은 각각 돌아가는 곳이 있어서 장수(藏修)하는 지역에 그 이름이 부합(符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어찌 산과 골짝의 신령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위금(撝禁)하여 세속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더럽힐 수 없게 해서, 도가 있는 사람에게 돌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우러러봄에 더욱 높고 뚫으려 함에 더욱 견고한 것은 바로 선생 도덕의 높음이고, 우뚝이 뛰어나고 늠름(凜凜)하여 범하기 어려운 것은 선생 기상의 엄함이며, 봄 화장을 짙게 한 듯 가을 꾸밈을 옅게 한 듯한 것은 선생 문장의 아름다움이고, 구름이 일어나 비가 내리고 사물을 적셔 널리 은혜를 베푸는 것은 선생 사업의 넓고 큼이니, 아! 공경할 만하도다. 혹은 산으로써 산을 보고도 도덕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유람으로써 유람을 하고도 학문에 도움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니, 어찌 족히 군자관(君子觀)이 되겠는가? 우리가 이곳에서 유람한 것은 원리에 통달하지 못하는 안목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가득히 자득(自得)의 묘함을 바라는 것 또한 얻음이 적지 않다. 다시 찾을 약속은 가을로 기약하고, … 동행한 자가 그 일을 기록하길 청하였고, 마침내 그 유람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서술한다. 계미년(1643) 초여름 상순에 몽암거사(蒙庵居士)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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