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어느 시인은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다. 필자는 젊은 시절,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자기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집을 나와 산을 오르곤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올랐다 내려오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그래서 남산을 비롯한 구미산, 단석산, 오봉산, 토함산 등을 수십 번을 오르고, 경주를 벗어나 태백산, 소백산,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등 국내의 유명한 산은 물론 금강산도 오르고 중국을 경유하여 백두산을 두 차례나 올랐다.
최근에는 걷기 열풍이 불면서 걷기 명소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해외 걷기 길로는 천주교 성지를 찾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의 제주올레길이 유명하다. 니체는 ‘진리는 호외에서 착상된다’고 했다. 필자는 마음이 언짢을 때, 쓰고자 하는 글의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집을 나와 걷는다.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러다 보니 경주시에서 지정한 경주걷기길은 거의 걸어보았다.
경주시에서는 신라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둘레길 10곳을 지정하고 있다. 이를 경주 걷기 길 10 Pick이라고 하는데 경주 숲길 10 Pick, 경주 야경 10 Pick, 경주 걷기 길 10 Pick, 지식 채우기 10 Pick, 일출 & 일몰 스팟 10 Pick, 여름 경주 힐링 스팟 20 Pick, 신라인의 숨결 경주 둘레길, 경주 빵지 순례 10 Pick, 경주 캠핑 & 캠크닉 10 스팟 등 여러 유형의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이 중에서 신라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10개의 둘레길이 있으니, 신라 이후의 경주 역사를 잇는 경주읍성길, 자연에 안긴 역사의 향기 선덕여왕길, 신라 문화의 중심지인 신라왕경길, 마음을 틔우는 보문호반길. 주상절리의 절경 파도소리길, 바다와 마을에 안긴 정겨움이 넘치는 감포깎지길,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기림사 왕의 길,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토함산바람길, 천년 신라의 이야기를 만나는 동남산 가는 길, 신라의 시작과 끝을 따라 걷는 삼릉 가는 길이 있다.
이 둘레길에서 선덕여왕길의 일부가 명활성 가는 길이다. 경주의 수많은 길 중 눈맛이 가장 시원한 길이 이 길이다. 진평왕릉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여기서 200여m를 가면 ‘명활성 가는 길’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명활성까지는 1.6Km이다. 농수로를 가운데 두고 동쪽 길과 서쪽 길이 있는데 서쪽 길로 가야 한다. 시선을 산쪽으로 돌리면 최근 지은 전원주택이 으리으리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보문들과 저멀리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봄에 벚꽃이 필 때면 꽃길이 된다. 군데군데 쉼터와 포트존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 길의 중간 지점에 명활산 등산로 이정표가 있다. 그런데 이 등산로는 정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갈림길이 있는데 왼쪽 길은 명활성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보문 이씨 마을에 이르게 된다.
출발 지점에서 명활성까지 천천히 걸으면 25분 쯤 걸린다. 한때 이곳에는 왕이 머물기도 했으며 반란군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647년(선덕여왕 16) 왕은 병세가 회복 불능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의 사촌 여동생인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상대등으로 왕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은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를 기치로 내걸었다. 즉 여왕은 선정을 베풀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때 반란군의 본거지가 바로 이곳 명활성이었다. 난을 일으킨 며칠 뒤 한밤중에 월성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비담 측은 왕이 크게 패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유신 측은 심리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커다란 연에 매달아 날려 보냈다. 마치 지난밤 떨어진 큰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이에 반란군의 사기는 크게 꺾이고 결국 김유신 등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다. 주모자인 비담을 베고 연루자 30명을 죽였다.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선덕여왕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반군에 의해 시해됐다는 설, 자연사설, 반란의 충격으로 인한 쇼크사설 등의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