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서 바로크시대는 1600년에서 1750년까지를 말한다. 여기서 1750년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J.S.Bach/1685-1750)가 사망한 해이다. 바흐는 일그러진 진주라 불리며 전례 없이 독특한 음악적 시도를 선보였던 바로크시대의 끝자락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전파와 중첩된 시대를 살았지만 그의 음악은 확연히 바로크적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바로크시대가 독일에서 바흐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바흐의 집안은 두세기에 걸쳐 50명이 넘는 걸출한 음악가를 배출한 명문이다. 바흐가 태어난 동네에선 ‘바흐’란 단어가 ‘거리의 악사’란 뜻으로 통했을 정도다. 바흐도 음악에 관한 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10살에 조실부모 하게 된다. 하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14세 연상인 큰형에게 작곡을 배우고 학교를 다녔다. 독일 출신의 동갑내기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배우고 영국에 귀화하여 활동한 국제적인 음악가였지만, 바흐는 평생 독일을 벗어나지 않았다. 18세에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궁정 단원으로 음악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바이마르와 괴텐의 궁정에서 악장을 지냈고, 마지막 27년은 라이프치히 교회의 음악감독(칸토르)으로 봉직했다. 합주협주곡과 모음곡은 바로크시대의 특징적인 장르다. 바흐는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 세속적 기악곡의 대다수를 궁정에서 일할 때 작곡했다. 바로크 음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바흐는 쾨텐 궁정의 레오폴트 공이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더 이상 궁정에서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723년에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직장을 옮겨야 했다. 교회이다 보니 당연히 세속음악보다는 종교음악의 비중의 높아졌다. 이때 마태수난곡과 160여곡의 교회 칸타타가 작곡되었다. 바흐의 가문은 명문가문이었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당대에 큰 주목을 끈 인사가 아니었다. 그는 토마스교회의 음악감독을 마지막으로 운명했고, 이후 고전주의 음악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혀졌다. 하지만 사후 반세기가 지난 1802년에 바흐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J.N.Forkel/1749-1818)은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발표하여 온 유럽에 바흐 열풍을 만들어냈다. 이후 멘델스존(J.L.F.Mendelssohn/1809-1847)이 마태수난곡 악보, 그리고 카잘스(P.Casals/1876-1973)가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우연히 발견한 것은 위대한 바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바로크음악의 대명사이며, 3B(바흐,베토벤,브람스)의 첫 번째 자격이 있는 음악가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