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옛날, 1980년대 초 초임판사 때의 일이다. 이문열 선생의 ‘영웅시대’를 읽고 분단의 비극이 초래한 결과를 목도하였다. 그리고 그 비극을 오롯이 견뎌낸 작가의 일생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때 대구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한 이 선생에게 한 번 뵙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찬 바람 부는 어느 쓸쓸한 늦가을 밤 서울 반포의 팔레스 호텔 커피샵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한 번 길을 트고 난 다음 우리 둘은 친해졌다. 7살이라는 상당한 나이차(물론 그가 연상)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술친구가 되었다. 그도 나도 엄청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나는 당시 전 법조계를 통틀어 주량이 1등 아니면 2등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도 2, 3일 주기로 술을 마셔 대취하지 않으면 원고를 쓸 수가 없는 기벽이 있었으니 오죽 술을 많이 마셨겠는가. 당연히 간에 탈이 나서 편자환 같은 약을 상복했다. 그리고 나와 만나기 얼마 전 대구의 주당들과 어울리다 취해서 접시를 뜯어먹는다고 했던 모양이다. 앞 이빨들이 우두둑 부러진 탓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발음이 새어 말을 알아듣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는 자주 서울 밤거리를 예사로 새벽 두 세시까지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이 선생은 한국 소설가 중 자료의 중요성을 가장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한 편의 작품을 쓰기 전에 미리 자료조사를 철저히 하였다. 그가 쓰는 문장은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가와바따 야스나리(川端康成) 선생 같은 미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처절한 현실감을 주어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것은 충실한 자료조사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당시 그가 변경 같은 대하장편을 쓸 때 법원도서관을 뒤져 관련자료를 찾아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이 선생이 물었다. “신 판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글쎄요?” 하며 멀뚱히 쳐다보았다. “하하, 빤쓰(팬티) 벗고 덤비는 자가 제일 무섭습니다” 그가 조금 설명해주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그토록 무섭단 말입니다” 그후 그와 나는 서울과 경주 혹은 대구라는 물리적 격리에 처해지며 사이가 소원해졌다. 다른 이유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와 나 둘 중에서 하나가 죽기 전에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이처럼 장황하게 이문열 선생과의 과거 인연을 쓴 것은, 앞에 든 그의 말이 최근 한국사회를 강타한 소위 ‘고발사주의혹’사건과 자꾸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뉴스버스라고 하는 인터넷매체에 제보한 조성은이라는 여성은 작년 총선 즈음하여 나를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 조○○변호사로부터 나에 관해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였다. 의외였다. 조 변호사는 내가 경주법원에서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많은 이들을 판사로서 거침없이 석방할 때 신임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경주뿐만 아니고 대구경북지역 전체의 검사들은 이런 나를 사갈(蛇蝎) 보듯이 싫어하였다. 아직 자식이 없던 나를 ‘고자판사’라고 공공연하게 손가락질 하며 모욕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힘들게 근무했는데, 그 신임검사가 나에 대해 호의적이었다니 의외였다. 그리고 고마웠다. 청년정당을 만들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청년들의 참신한 기풍이 혼탁한 정치판을 정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전반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은 그가 야심가이며 말이 너무 빠르나, 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또 정치를 하려고 하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뉴스버스 제보를 전후하여 박지원 국정원장과 만난 사실이 들통났다.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화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호화로운 생활과 정부보조금 유용 등의 사실이 드러나며 도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세간의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그동안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던 그는 급기야 윤석열 후보나 국힘당 김기현 원내대표까지 고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는 과연 무엇을 믿고 이처럼 일견 거침없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이문열 선생이 가장 무섭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했던 사람에 속하는 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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