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끼고 자다가 왼쪽 다리를 우그러뜨린 아들 녀석과 안경점엘 왔다. 안경을 고치는 사이에 녀석은 공짜 음료수 중 뭘 마실까 눈을 가늘게 뜨고 거북목을 하고 있다. 잠시 잠깐 잘 안 보여도 불편한데 세상에는 한 평생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절대 울지 않기 챌린지(Try not to cry Challenge)’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에서는 색채를 식별하는 감각이 불완전해서 빛깔을 가리지 못하거나 다른 빛깔로 잘못 보는 색맹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색깔을 보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들 손에는 색각(色覺) 교정 안경이 들려 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안경을 쓰자마자 입을 틀어막는다. 놀란 눈으로 여기저기 주변을 바라보다 자신의 바지에 이르게 되자 “블루진! 이게 내 바지 색깔이었어”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파란 청바지를 ‘처음’으로 본 것이다. 깜짝 선물이라며 아내가 건넨 안경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남편은 각오가 되었는지 한참 만에 안경을 쓴다.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두 딸을 그저 꼭 껴안는다. 안경 사이로 보이는 촉촉해진 눈은 노란 머리에 파란색 리본을 한 ‘진짜’ 딸을 연신 따라다닌다. 남편의 흐느끼는 등을 느꼈는지 그 너머 아내는 “잘 보이나 보네(working)”하고 안도한다. 아빠는 연신 안경을 썼다가 벗어보지만 시선은 여태 못 본 딸을 계속 향한다. 일상(日常)이 기적임을 증명하는 이 영상을 볼 때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주책없이 흐르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다. 가만히 주변을 돌아본다. 늘 그 자리에 있던 탁자이고 소파며 창 너머 보이는 하늘이다. 평범한 이 일상의 당연함이 어느 누구에겐 한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그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고도 미안한 마음이다. 영국에서 사는 하비슨이라는 사람은 3만 명 중 1명꼴로 나타난다는 전색맹(全色盲)이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 밖에 분명 있는, 그 알록달록한 세상을 인지하고 싶어 방법을 강구한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도움으로 결국, 빛의 파장을 ‘소리로 해석’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낸다. 작동원리는 이렇다. 특수한 장치로 감지한 색깔을 머리 뒤쪽 후두골 위에 심어놓은(!) 칩에 주파수 형태로 전송하면, 골전도(骨傳導)를 통해 두개골 전체로 퍼지게 되고, 뇌는 그 진동을 소리로 해석한다고 한다. 기술적으로 이것이 무슨 말인지 잘(사실은 전혀) 모르겠지만, 인문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가령 택시 기사님한테 이렇게 주문했다 치자. “○○동에 있는 우체국으로 가주세요” 목적지를 듣고는 기사님은 바로 핸들을 꺾기 시작한다. 이 목적지를 자동차는 그럼 어떻게 인식할까 상상해 본다. 17초간 직진 후 3초 동안 우회전, 1분 12초 동안 다시 직진… 뭐 이런 식이 아닐까? 서울까지 가는 방식이 여럿인 것처럼 우체국까지 가는 방식이나 언어는 다양하다. 어쩌면 색깔을 ‘들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낸 장치를 통해 살펴봤더니, 대상을 바라보는 족족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란다. 하비슨은 자신이 들은 소리와 해당 색깔이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왕왕대는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리와 소음이 구별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주변을 걸어보면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안다. 내가 찾고 있는 ○○이비인후과 상호 주변에는 별의별 상호나 광고나 심벌이 있을 거다. 웬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목표물을 놓쳐버리기 십상을 정도로 말이다. 이걸 뇌의 입장에서 본다면 접수되는 수 천, 수 만의 감각들 사이에 필요한 감각만을 선택적으로 인지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2015년 학술지 〈프런티어 인 스시템 뉴로사이언스Frontiers in Systems Neuroscience〉에 실린 그의 뇌 촬영 연구는 인생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상(日常)의 연속임을 과학적으로 증험한다. 실제로 어깨가 아파보니 알겠다. 면도는 한 손으로 그나마 할 만한데, 머리 감는 미션은 의외로 복잡하고 어렵다. 거기에 허리라도 아프면 와, 이건 거의 예술이다. 무릎을 꿇고 울어가면서 한 손은 거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겨우 머리를 감는다. 일상의 비범함이랄까. 외할머니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강생아, 밥은 묵었나?” 그건 지금도 유효한, 진리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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