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설명이 대단히 디테일 하다. 시공간의 초월을 전재로 시각적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한 그야말로 무대 작업을 철저히 의식한 집필이다. 현대극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인 허상과 현실의 대립을 충분히 드러낸다. 현실 사이로 허상이 스스럼없이 차고 들어오는 것을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하기 위한 무대를 십분 활용하게 한다.
우선 희곡은 소설이나 시 그리고 어느 문학 장르와 확실시 구분된다. 물론 읽고, 감상하기도 하지만 목표는 엄밀하게 타 장르와 다르다. 정확하게 관객과 무대형상화를 염두에 둔 텍스트임에 이설이 없다. 그만큼, 연출자이자 희곡작가인 아서 밀러는 당시 시대적 아픔과 배경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무대화하기 위해 시작부터 아주 긴 지문을 할애하고 있다. 주인공 윌리의 집의 구조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있다.
연극은 주인공 윌리가 늦은 밤 귀가해서 그 다음날 밤 자살하기까지 단 하루의 시간 동안 대과거와 현재, 과거를 치밀한 계산으로 넘나든다. 두 아들 해피, 빌리, 아내 린다 그리고 그의 형 벤과 이웃들을 소환해서 윌리를 적나라하게 난도질하고 있다.
많은 평론가들은 원작의 극적 구조와 상황 전개를 느낌과 감정을 중심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두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단히 비언어적이고 비지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큰 호소력과 감동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극적 행위를 이제야 공감하는 필자는 스스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를 되뇐다.
윌리는 영웅적이거나 거룩하거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고 예순을 살아온, 아무 데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래서 반갑고 더더욱 안타깝다. 특히 윌리가 전막을 통하여 전하는 대사는 캐릭터를 꾸려가기에 너무나 충실하다.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과장되고 극적인 대사는 전후 상황을 견인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인간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엄정한 평가 이전에 감상적인 동정이나 감정의 과잉 상황을 해결하는 멜로드라마적 구조가 한국적이고, 통속적이어서 필자에게는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윌리를 보면서 내 아버지를 또 나를 그리고 경주에서 자라면서 만났던 내 친구의 아버지, 그리고 지금의 내 친구를 만난다. 무례하고 무식한 행동과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해대며 피할 수 없는 상황에도 유치하고 위선적인 방법으로 자기합리화를 거침없이 한다.
사이사이에 짜증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윌리)에게 살아있는 모습을 연기할 수밖에 없게 유도하는 작가는 역시 탁월하다. 연극을 처음 접했던 70년대부터 연극을 광적으로 사랑했던 80년대, 최근까지 만났던 윌리는 이순재, 전무송, 김인태, 그리고 대학극에서 젊은 연기자들이 뿜어내는 취기 어린 윌리를 익히 봐왔다. 솔직히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나이 50세 즈음까지는 안타깝게도 텍스트도 무대 작업도 연기자의 연기도 그저 그랬다. 공감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절실하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최근 내가 직접 쓰고 연출을 하려고 준비하는 장편독립영화 ‘내일은 뭐하지’를 Bilt up하던 중 갑자기 ‘세일즈 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와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끼라의 ‘이끼루’가 내 뇌리에 또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주저함 없이 출판서에서 출판한 번역본을 구해서 다시 음미하면서 읽었다. 연극계에서 돌고 도는 공연 제작용 텍스트가 아닌 완전체 대본으로. 그렇게 곱씹으며 읽던 중이었다.
윌리의 처지가 한없이 불쌍했다. 그리고 윌리의 아내 린다 역시 내 어머니를, 내 아내를 그리고 친구의 아내 친구의 어머니를 소환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면서 그저 생을 이어가는 남편을 무던히 사랑하고 끝없는 신뢰로 철없는 두 아들을 끌고 가는 모습은 처절하다.
린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돈을 번적도,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솔직히 지금 나이에 이 작품을 연출할 기회가 온다면? 꿈꾸어 본다.엄기백(연출감독/배우) :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후 KBS PD로 TV문학관 등 다수의 작품 연출했고 KBS수원드라마 센터장을 지냈다. 경주예술의 전당 관장 겸 경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을 역임했고 경주시립극단 예술 감독을 맡아 활동했다. 현재 경주를 소재로한 영화를 준비 중이며 배우로 새로운 인생2막을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