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는 음악가 집안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바흐가 그랬고,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그랬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헨델(G.F.Händel/1685-1759)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부친은 궁정의 외과의사였다. 부친이 헨델을 낳은 건 63세 때다. 늦둥이 중의 늦둥이였다. 늙은 부친은 아들이 율사가 되길 원했지만, 헨델은 결국 음악인이 되었다. 헨델은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21세의 나이(1706년)에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다. 오페라의 발상지이자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25세 때(1710년)는 큰 행운이 찾아온다. 당시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던 하노버의 선제후에게 인정을 받아 하노버 왕국의 왕실 악장이 된 것이다. 헨델의 운명적인 영국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헨델에게 하노버는 런던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이듬해 (1711년)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Rinaldo)’가 발표되자 헨델은 하루아침에 스타 작곡가로 등극한다. 공연은 반년이나 흥행가도를 달렸다. 이제 영국 왕실의 관심이 젊은 이방인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그는 모차르트처럼 30대에 단명한 자국의 스타 작곡가 헨리 퍼셀(H.Purcell/1659-1695)을 대신하여 영국 오페라의 아이콘이 된다. 헨델에게 꽃길이 열린 셈이다. 헨델은 오페라 리날도의 흥행으로 큰돈을 벌었다. 또한, 당시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큰 수익을 낸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에 투자하여 돈을 크게 불렸다. 그는 모은 돈으로 일종의 오페라 회사인 ‘왕립 아카데미’를 설립(1719년)한다. 그런데 근10년을 승승장구하던 헨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존 게이(J.Gay/1685-1732)가 쓴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런던을 휩쓴 것이다(1728년). 이 작품은 런던 거지와 창녀의 이야기로 권력을 풍자한다. 게다가 영어로 되어있어 영국국민이 이해하기도 좋다. 따라서 헨델이 제작한 이탈리아 오페라(opera seria)는 점점 설 땅을 잃게 되고, 왕립 아카데미는 1737년에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된다. 헨델은 큰돈을 잃고 오른쪽 반신불수가 된다. 이런 헨델에게 구세주가 된 것이 바로 오라토리오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 유사장르이지만 무대나 의상비용이 들지 않는 가성비 만점의 극장르다. 1742년에 발표된 ‘메시아(messiah)’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 단연 최고의 히트작품이었다. 클래식에 아무리 문외한이라 해도 ‘할레루야’를 연방 외치는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헨델이 이 작품으로 재기에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헨델이 죽기 직전에 지휘한 작품도 메시아다. 코벤트 가든에서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영원히 잠들었다(1759년). 1.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린 것은 성(性)의 문제가 아니다. 바흐처럼 ‘서양 클래식 음악의 시조(始祖)’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헨델은 오늘날의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주요 활동무대는 영국이었다. 따라서 독일과 영국 모두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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