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17년 『동방한문학』71집에서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유기의 특징 고찰」KCI논문을 다루며 경주를 다녀간 조선선비 19편의 기행문 발자취를 다룬 적이 있었다. 기행문의 대부분은 경주 외부인의 기록이었지만, 여강이씨 우와(寓窩) 이덕표(李德標,1664~1745)의 「수승록(搜勝錄)」은 경주인으로 경주를 답사하며 유자(儒子)의 입장에서 유적을 사실적으로 적확하게 기술하였다. 수승록은 1704년 당시 경주 남산에 대한 고증자료이면서, 과거의 신라 고적과 현재의 경주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우와선생은 조부 이교(李皦), 부친 이기(李垍)와 모친 월성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이 빼어났다. 1699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옥산서원․동강서원․서악서원․향교 등에서 재임(齋任)을 맡았으며, 향중에 덕망이 높았다. 말년에 인산서원 방화사건과 관련한 계림사화(雞林士禍)에 연루되어 용천(龍川)으로 귀양 갔고, 이후 가문을 위해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을 살았다.
「수승록」은 가을에 향교를 출발해 반월성-남산-불국사-석굴암-골굴암-기림사-감은사-이견대-대왕암 등 명승지를 둘러보았고, 특히 남산의 경로는 상서장에서 남산산성을 지나 금송정과 산신당에 이르고, 용장골의 매월당을 거쳐 동쪽으로 개선사를 지나 서출지 주변으로 내려와 불국사로 발길을 돌린다.
남산의 산태처(産胎處)와 산사당(産嗣幢) 기록 등은 아들을 낳고자 한 당시의 기복신앙을 엿볼 수 있으며, 지금도 상선암 뒤로 솟아 있는 봉우리에 남산의 신 상심(祥審)이 살고 있는 상사바위가 있고, 바위 남쪽 면은 인기 있는 기도처로 1864년에 새긴 산신당(産神堂) 명문이 남아 있다. 게다가 몸이 허하고 풍사가 머리에 침습하여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구역질과 현기증나는 풍현(風眩)에 좋다는 약수가 있었다고 전한다. 앞으로 고전 연구를 통해 남산에 관한 자료가 많이 발굴되어 경주를 대표하는 명승지 남산으로 거듭나길 희망해본다. -명승지를 찾아 나선 기록-수승록(搜勝錄) 갑신년(1704) 내가 가을 교임(校任)으로 있을 때 사채(舍采)일을 맞이해 회중(會中)의 여러 장로 및 두서너 명의 동지와 가을철에 함께 유람하자고 약속하였다. … 월성을 경유해 남쪽으로 가 비로소 고운 최치원선생의 상서장(上書莊)에 이르렀다. 온갖 잡초가 우거져 지난 자취가 보이지 않았지만, 높은 지조를 상상하고 우러르니 감개무량하였다.
앞으로 1리쯤 가니 옛날 장성(長城)의 빈터가 산허리를 감돌고 있었다. 세속에 신라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전하지만 그 상세한 일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수백 보를 나아가니 큰 반석이 좌우에 우뚝 서 있는데, 따라가는 한 종이 그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이른바 비암(飛巖)입니다. 바위에는 못을 박은 흔적이 있습니다.”라 하였다. 또 그 곁의 한 바위를 가리키며 “이것은 옛사람이 아이를 낳은 곳[산태처(産胎處)]인데, 돌 사이에 아 직도 누런 핏자국이 남아 있고, 또 탯줄 끊은 가위를 둔 자취도 있습니다”라 하였다. 그 아래 바위 구멍에는 샘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는데, 사람들은 약수(藥水)라 하고, 풍현(風眩)의 질병이 있는 자가 이곳에서 몸을 씻는 자가 많다고 하였다. 다시 한 층을 올라가서 산사당(産嗣幢) 곁에 앉아 쉬었다. 떨어진 갓과 무명베 짧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앞에 와서 절을 하며 맞이하기에, 그에게 물으니 산 아래의 사람으로, 이곳 산사당을 맡아서 관리하는 일로 생계 삼는 사람이었다. 바위 높이는 몇 길이 되었고, 그 위에는 아이를 낳는 모양이 있어서 산사당의 이름이 얻어졌으며, 그 바위 허리를 깎아 등불을 밝히는 곳으로 삼았다.
서쪽으로 10여보 거리에 큰 석벽이 서 있고,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고개에서 아래까지 사람들이 앞다투어 복을 빌고 있으니, 사람들이 괴이한 것을 좋아함이 심하였다. 바위 아래에서 조금 쉬며 추로주(秋露酒)로 목을 축였다. 걸어서 바위 끝에 올라가 성시(成市)를 굽어보니, 온 땅에 집들이 가득하고 여러 산봉우리들이 읍하는 듯하며, 멀고 가까운 산천이 눈 가득 들어오니, 관람의 장관이 참으로 시원시원하였다. … 동쪽을 바라보면 높이 솟은 것은 상사암(思巖巖)이고, 북쪽으로 돌아보면 잡초가 우거진 평평한 곳은 금송정(琴松亭)이었다. 그 밖의 고적들은 모두 허물어져 사라졌고, 그 자취는 없고 그 이름만은 남은 것 역시 다 기술하기 어렵다.
산 능선을 따라 내려와 매월당(梅月堂)에 이르렀다. 숲은 깊고 경계가 외딴 곳이라 경치가 매우 좋았다. 당 앞에는 북향화(北向花) 꽃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김시습 공이 직접 심은 것이라 하였다. … 전하는 이야기에 『매월당집』이 이곳 암자에 보관하고 있다기에 한 승려를 시켜 가져오게 해 보았다. 모두 8권인데 두 권은 관가에서 가져가 유실하였다고 하였다. 인본(印本)이 정밀하고, 문장이 묘하여, 책을 펴서 읽을 만하였으나, 갈 길이 바빠 여유 있게 보지 못하고 대강 보아 넘겼다.
걸어서 좁은 산길을 따라 동쪽으로 한 골짝을 넘어 개선사(開善寺)에 도착하였다. 불전은 황량하고 기거하는 승려도 적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말을 타고 남산으로 향하다가 임(任) 상사 어른을 지나는 길에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