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승희
친절한 사람꼭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아친절한 사람은 피하고만 싶다진실한 사람내가 들킬 것만 같아진실한 사람 앞에선 늘 불안하다​나는 친절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속에 무엇이 있는지 본심을 모르는 사람은 무섭고진심으로 오는 사람은 진실의 무게만큼 무겁다변심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변심이 너무 없는 사람도박제……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단무지나 베이컨은 온몸이 조용한 진심이라고 한다면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다말하자면 본심의 배신이자 돼지머리처럼 눌러놓은 꽃이다​프로이트의 박물관처럼 본심은 어둡고 원초적이고진심 뒤에는 꼭 본심이 도사리고 있는데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본심이다거기까지는 가보고 싶지도 않고 숨겨진 본심이 나는 무섭다과녁에서 벗어난 마음들을 탁 꺾어버릴 때 나오는 진심, 허심이란다적어도 단무지는 뼛속까지 노랗고 베이컨은 앞뒤로 하양 분홍 줄무늬다​무엇을 바라는가내일이 없는 지 오래되었는데무엇을 바라는가진심이 바래 섬망의 하얀 전류가 냉장고 속에 가득 차 있는데무엇을 바라는가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무엇을 무엇을 무엇을 더 바라는가
-겉과 속이 노랗거나 분홍색이거나
친절한 사람, 잘 웃는 사람에게서 당해본 적이 없는가? 철철 넘치는 교양미와 웃음, 혹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짓는 넉살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잘 없다. 또한 너무 진실해서 내가 무거워질 것 같은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다 불편해지는 사람도 만나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절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심을 하기 쉽고, 진실한 사람은 “그 진심을 감당하기에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그 진심이, 껍데기를 벗으면 속에 또 다른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실망을 거듭하면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가 베이컨이 되고 싶”은 것이다. “온몸이 조용한 진심”인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는 선언은 거짓이 진심 행세를 하는 세상에 대한 거침없는 일갈이다. 더욱 진심이 “돼지머리처럼 눌러놓은 꽃”이 되어버리고, ‘허심’이 된 채 본심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에서 친절한 사람, 진실한 사람을 대하기가 불안한 것이 시인만의 인식일까? 그리하여 “뼛속까지 노”란 단무지가, “앞뒤로 하양 분홍 줄무늬”인 베이컨이 위안이 된다. “진심이 바래 섬망의 하얀 전류가 냉장고 속에 가득” 찬 시대, 그런 사람 사이의 관계를 떠올린다. 일상적 소재를 통해 동시대의 고통과 인간관계에 대한 사유가 거듭 갱신된 시를 만나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김승희, 그녀는 여자 김수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