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묘에서 보문마을길을 따라 남으로 750여m 정도 가면 보문사지에 이르게 된다. 사찰 이름이 어떻게 보문사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이 세간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해 나타날 때[응현(應現)]에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도록 중생의 근기에 맞게 33가지 몸으로 바꾸어 나타난다. 이를 불가에서는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는데, 관세음보살께서 ‘넓은 문으로 (몸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보문사라는 사찰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1916년 11월 일제강점기에 절터 주변 지역에 많이 흩어져 있던 기와와 벽돌 조각을 조사하던 중 ‘보문(普門)’이라고 쓰인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보문사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문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다행히 보문사와 관련한 기록이 두 곳의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1964년 도굴되었다가 1966년 회수된 황룡사 9층목탑 사리함기[찰주본기(刹柱本紀)] 중 ‘普門寺 上座僧 隱田’이라는 기록에서 보문사라는 사찰명이 나온다. 이는 신라 경문왕 11년(871년) 8월 12일에 황룡사 9충목탑을 중수하면서 묻어 두었던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보문사는 적어도 871년 사세가 번창하여 황룡사 목탑 중창 불사에 도감 15명 중 6번째로 보문사 상좌승 은전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리함기에는 신라의 그 많은 사찰 중에 보문사만 언급되어 있다. 당시 보문사의 비중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리함기와 함께 도굴꾼으로부터 회수된 중화 7년명 사리기에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보문사 현여(玄余) 스님이 무구정광경에 의해 소탑 77구를 조성하고, 진언(眞言) 77본을 정사(淨寫)하여 큰 탑에 봉안하였다” 이 기록에도 당시 신라의 그 많은 사찰 중 오직 보문사의 승려만 언급이 되어 있어 당시 보문사의 사격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 눈여겨볼 것이 석탑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 보문사지에는 석탑지로 추정되는 곳이 없고 연화문 당간지주에서 가까운 북쪽 논둑 가운데 대형 석탑재로 보이는 석재가 있다. 그러나 이 석탑재는 위치로 보아 보문사의 경내가 아닐 수도 있다. 보문사지는 1994년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현재 보문사지에는 보문들 한가운데 여기저기 금당지, 목탑지, 당간지주, 석조를 비롯하여 많은 유구와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안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농사철에는 논에 물을 가득 대어 놓아 접근이 어렵다. 여기저기를 자세히 살피려면 농사철을 피하는 것이 좋다. 논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초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절의 금당(金堂), 경루(經樓), 문, 회랑(回廊) 등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목탑지(東西木塔址) 및 절 북서쪽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문사가 방대하고 장려하게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역이 대단히 넓고 특히 두 곳에 당간지주가 있어 2개 이상의 사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다.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개시허망)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 卽見如來(즉견여래)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 구절은 『금강경』의 핵심으로 “신상(身相)을 가지고 여래[眞理]를 볼 수 있겠느냐?”고 붓다가 묻자 수보리는 “신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붓다께서 이때 하신 말씀이다. 존재하는 온갖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相=현상)에서 상 아닌 비상(非相=본체)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한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재 등을 살피면서 애써 옛 모습을 찾으려는 필자의 머리가 갑자기 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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