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지하주차장, 이리저리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하, 저기에 주차했었구나! 오늘도 겨우 ‘숨은 내 차 찾기’에 성공했다는 뿌듯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 차 바로 옆 SUV 차량 보닛에 앉은 까만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저 녀석도 나만큼이나 무서울까? 괜히 휘파람을 부르며 손을 휘휘 젓는다. 고양이는 나를 경계하면서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 우아함마저 무서운 나는 얼른 차에 올라탄다.
며칠 전부터 주차장 코너 부근에 못 보던 사료통하고 물통이 놓여 있다. 그걸 본 다음부터는 차 문을 열기 전에 꼭 차 여기저기를 두드리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나 차 밑에 고양이가 있지는 않을까 해서 말이다. 고양이 밥그릇을 놔둔 게 누군지도 안다. 같은 동에 사시는 아주머니인데 마스크 너머 인상이 푸근하시고 눈웃음이 많은 분으로 기억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면 빈 물통을 쥐고 계신다. 지하주차장 고양이 물통엔 어김없이 물이 가득 차 있었고.
길고양이도 귀한 생명이라 음식과 물 등 도움을 주는 걸 이해한다. 밥그릇에 규칙적으로 사료가 채워지면 주변에 고양이가 몰려오는 것도 안다. 선한 의지로 밥을 챙기는 행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친다는 것도 물론 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된 보신각 울타리에 붙은 경고문 사진 한 장이 인터넷을 달군다. ‘유물 보존을 위해 종각 안에 고양이 사료를 넣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보신각 종각(문화재 보물 2호) 안에 고양이 사료를 넣어둔 사실이 전해지자 누리꾼들이 올린 사진이다. 용인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길고양이 집을 만들고 있던 주민이 떨어진 벽돌에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망자는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고양이 동호회 회원이었다고 한다.
길고양이 배설물에 잔디밭이나 텃밭을 망쳐버린 누군가가 ‘고양이 먹이를 준 후 발생한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면 ‘쓰레기는 치우겠다. 그런데 고양이들이 굶는 게 불쌍하지도 않나. 아량을 베풀라’는 반박글이 따라 붙는다. 마치 파도처럼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소위 캣맘에 대한 혐오감도 커지는 만큼 ‘캣맘이 폭행을 당했다…가해자를 엄벌해 달라’는 국민 청원도 있다. 갈등은 심해지는데 좀처럼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기막힌 백종원식 솔루션이 없을까?
기가 막히는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어이없는 농담 하나를 인터넷에서 찾았다. “어느 이웃이 새벽 2시 반에 우리 집 문을 두들기더라고! 새벽 2시 반이라니, 이게 말이 돼? 다행히도 내가 그 시간까지 드럼을 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정말 이런 뻔뻔한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걸 해석하는 버릇이 있다. 본능처럼 말이다. 밤새 드럼을 친 원인제공자가 오히려 새벽에 남의 집을 두드리는 예의 없는(?) 이웃을 다행스럽게(luckily) 맞이했다는 논리는 자기중심적 해석의 끝판이다.
일방의 행동은 타방에 영향을 미친다. 어린아이는 모른다. 마트에서 장난감을 안 사주는 엄마를 골탕 먹이려고 바닥을 구르는 행동을 하면서 알게 된다. 아이들이 철이 든다는 건 고무적이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철이 든다는 건 자기반성적(自己反省的) 사고를 시작했다는 의미니까. 내 행동에 남 눈치를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고양이가 가여운 것과 배설물 처리는 다른 문제다.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면 주변을 어지럽히는 배설물도 가여운 마음으로 치웠으면 좋겠다. 길고양이에게 정성을 보일 정도면 차라리 집에서 키우라고 쏘아붙이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나온, 최선일 수도 있다. 산책로 등 공용 장소에 비닐하우스로 만든 고양이집을 가끔 본다.
불법으로 점유한 것이기에 철거 대상이다. 하지만 외로워서, 말벗이 필요해서 이렇게라도 한다는 어느 할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비닐 너머 겁에 질린 고양이 눈빛에서 어르신 모습이 겹쳐 보인다. 길 위에 사는 녀석에게 정을 붙이려는 듯 연신 말을 건다.
“어디 아프나, 왜 오늘은 안 먹노?” 과자 부스러기를 줍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식사를 하셨는지... 뒤축이 심하게 닳은 낡은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