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개월 정도, 서울 출향인 엄준섭 씨는 작심하고 책을 읽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 눈길을 끈다. 엄준섭<인물사진> 씨가 마음 다잡고 책을 독파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20년 10월부터. 그간에 독파한 목록이 줄 잡아 20여종 250여권이다.
엄준섭 씨의 독파 목록에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김홍신의 ‘인간시장’과 ‘대발해’,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정글만리’, ‘한강’ 등 화제작,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 최명희의 ‘혼불’, 박경리 선생의 ‘토지’ 등 국내 작품들과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 등 중국 역사 소설,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금세기 최고의 환타지 소설로 알려진 ‘해리포터’ 시리즈와 허명만 화백의 만화 ‘식객’ 시리즈 등 장르를 불문한 책들이 포함되었다. 유흥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터키 횡단 도보 여행기인 ‘나는 걷는다’도 독파했다. 보기에도 시대를 풍미한 대단한 걸작들이다.
이중에서도 엄준섭 씨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가장 인상 깊게 보았다고 회고한다. 부인이 대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책을 20여년 전에 한 번 읽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는 엄준섭 씨는 책을 덮고 나서도 “지리산에서 맴도는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며 진한 여운을 표현했다. 영화 ‘태백산맥(1994)’로 제작되어 인기 끌었던 태백산맥은 1983년 월간지 현대문학에 연재되며 1986년 제1부 3권부터 1989년 제4부 3권까지 총 10권으로 한길사에서 출판했고 2002년 해냄출판사에서 10권으로 다시 출판했다.
태백산맥은 80년대 지식인 혹은 지성인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봐야 한다고 믿을 만큼 중요한 도서목록이었다. 이 책이 사회적으로 굉장한 파문을 일으킨 것은 그 이전까지 다루지 못한 이념의 문제를 내놓고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이념을 다룬 소설이라면 이병주의 ‘지리산’ 정도였다. ‘지리산’은 빨치산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의 삶을 조명하며 좌파 이념화의 과정과 빨치산 활동 속에서 무너지는 공산주의 이념의 허구성을 그렸다. 이에 비해 태백산맥은 해방 후 좌우의 혼란한 대립양상을 ‘벌교’와 ‘지리산’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분히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했다. 좌우이념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속에서 좌와 우를 막론하고 행해지던 폭력과 만행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한편 이념을 떠나 사람 자체를 중요시하는 중심인물들의 숭고한 가치를 잔잔하게 풀어냄으로써 극단에 치우친 이념적 편중을 누그러뜨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엄준섭 씨가 한 눈에 봐도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작들 중에서 굳이 태백산맥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대학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화의 물결이 치열하던 80년대 중반, 서울의 대학가는 우파의 허울을 뒤집어 쓴 군부독재가 휘두르는 폭압에 맞서 좌파의 이론을 몸에 감은 학생들이 치열하게 부딪치던 극한 대립의 현장이었다. 매캐한 최루탄으로 눈물이 쑥쑥 빠지는 대학 캠퍼스에는 한쪽은 붉은 머리띠를 두른 학생들이 짱돌과 화염병을 들었고 한쪽은 방석복에 최루탄 발사기를 든 전투경찰들이 진 친 채 서로를 향해 살벌한 공격을 주도했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안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독재가 만든 비극의 결투장에서 장기판 졸이 되었던 젊은이들에게 태백산맥은 시대를 뛰어넘어 동질감을 안겨줬던 것이다.
어쩌면 2021년 역시 무모하지만 첨예한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다행인 것은 해방 후나 80년대와 달리 지금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로 진영을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로 불편한 심기는 드러낼 수 있어도 최고위 누구의 명령 하에 서로를 향해 총질하거나 서로에게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는 일은 없어졌으니 이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전 세대 지리산과 태백산맥이 이념을 나누는 산맥이었다면 미래 세대 태백산맥은 화해의 굳건한 상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엄준섭 씨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다 2010년부터 유명 플랜차이즈 퓨전일식집을 경영하던 중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직전인 2019년 10월경 사업을 중단하고 현재 독서로 자신을 북돋우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