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성벽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지난 2017년에 이어 추가로 발견됐다. 특히 신라 왕성인 월성의 축조 시기가 4세기 중엽~5세기 전후인 점과 축성 방식에 대한 최초 분석 결과도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7일 월성 서성벽 문지 주변 발굴조사에서 4세기 중엽 인신공희로 추정되는 성인 여성 인골 1구와 동물 뼈, 토기를 출토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인골이 확인된 곳은 지난 2017년 국내 최초의 인신공희 사례로 관심을 모았던 50대 남녀 인골에서 북동쪽으로 불과 50㎝ 떨어진 곳이다. 여성 인골의 키는 약 135㎝ 전후로 왜소하며, 20대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인골 위에는 풀과 나무판자를 덮은 상태로 발견됐고, 목은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발견된 인골에서 저항 흔적이 없어 사망한 뒤 묻은 것으로 추정됐다. 인골은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 팔찌를 착용했다. 왼손 손가락 사이에서 복숭아씨 한 점, 머리맡에서는 토기 2점이 포개진 채로 확인됐다. 함께 발견된 동물 뼈는 말·소·사슴 등 덩치가 큰 포유류로 분석됐다. 뼈는 늑골 부위 위주로 해체해 묻어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여성 인골과 2017년 당시 남녀 인골 등 3구의 인골은 에나멜 질감 형성 정도를 봤을 때 영양 상태가 좋지 않고, 고급 유물이 없는 점을 들어 신분이 낮았던 것으로 판단했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사람은 모두 죽인 뒤 성벽에 묻은 듯하다”며 “인신공희는 성벽의 기초부 공사를 끝내고 높이 쌓아 올리기 전 성벽과 문지가 견고하게 축조되길 바라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이와는 별개로 이번 조사 지점으로부터 약 10m 떨어진 곳에서 1985년과 1990년 조사 당시 수습한 출처 불명의 인골 20여구는 인신공희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으나, 출토 정황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신라의 인신공희는 국내 유일의 성벽 의례로, 현재까지 신라가 최초로 축조한 왕성 월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이는 제방을 쌓거나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주(人柱) 설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상나라(기원전 1600∼기원전 1000년께) 시기에 성벽 건축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풍속이 유행했다고 전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에 충혜왕 4년(1343) 인주 설화와 관련된 유언비어가 항간에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성주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중국 주나라(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때 의례 혁명이 있은 이후로 인신공희 같은 것들은 원시적인 예습이라고 폐기한다. 1000여년 뒤에 신라 한복판에서 이런 의례가 행해졌다는 게 대단히 흥미롭다”며 “초기 국가 형성기 대중들을 장악하고,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는 권력 장악의 측면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월성 성벽의 인신공희는 여전히 국내 유일의 사례이며 이러한 자료들이 계속 축적됨으로써 신라인들이 성벽을 견고하게 쌓고, 무너지지 않게 염원하기 위해 어떤 제의를 했는지 점차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월성 축조 시기 문헌보다 250년 늦은 ‘4~5세기경’ 확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 월성의 축조 시기와 축성 과정을 파악한 점도 중요한 성과라고 강조했다. 월성의 축조 시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월성이 파사왕 22년(101년)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이 기록은 실제 축조 연대보다 많이 앞당겨진 시기로 여겨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문헌보다 250년 정도 늦은 4세기 중엽 공사를 시작해 5세기 초반 완공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이는 출토 유물 40여점에 대해 목재·유기물질의 가속질량분석기(AMS) 분석을 통해 측정한 결과다. 또 축성 소요 기간은 기저부 조성을 시작으로 중심 토루(土壘)를 쌓고, 4차례 성벽 성토까지 약 50~70년이 걸린 것으로 판단됐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축성을 시작한 시기가 4세기 중엽이라면 사로국 주변 지역을 병합해 신라 국가가 탄생하는 시기였다”며 “왕호를 마립간이라 하고, 적석목곽분이 경주 분지에 축조되는 시기와 맞물린 것으로 초기 신라 국가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월성 서성벽은 너비 약 40m, 높이 10m 이상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성이지만, 축조 수준은 토목공학적으로 다양한 축성 기술이 집약돼있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먼저 성벽 기초부는 일정 간격으로 나무 말목을 박은 지정(地釘)공법과 목재, 식물류를 층층이 깐 부엽(敷葉)공법 등을 통해 월성 지형의 연약한 지반을 보강했다. 이후 인신공희를 한 뒤 본격적으로 성벽 몸체를 만드는 체성부 공사에서 볏짚·점토 덩어리·건물 벽체 등을 다양한 성벽 재료로 사용해 높고 거대하게 만드는 토목 기술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번 조사를 통해 신라시대 거대한 토목 구조물인 월성을 짓기 위해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떤 방식으로 축조됐는지 밝힐 수 있었다”면서 “월성을 세울 당시 풍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신라의 행정운영 체계를 탐구하고, 백제 풍납토성 성벽과 비교하면 소략한 문헌 기록을 넘어 역사의 실체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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