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애 엄마는 아들 방엘 들어가지 않는다. 강한 수컷(!)의 냄새 때문이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들 냄새가 싫지는 않은데, 여자들은 남자의 테스토스테론 냄새가 역한 모양이다. 아기 때는 응가 냄새도 좋다더니만, 녀석이 목소리도 굵어지고 체모도 증가하는 등 2차 성징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아들 방은 청소 때 말고는 거의 안 들어간다. 세탁한 속옷 배달도 꼭 나를 시킨다.
그 사람만의 향기를 제대로 알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건 맞다. 너무 가까워도 향수나 로션 냄새가 너무 강하고, 그렇다고 너무 멀어도 잘 모른다. 딱,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비단 냄새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벌어진 사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적절한 거리에서의 객관적인 시선은 필수적이다.
냄새나는(?) 우리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꼭 입에 뭔가를 물고 들어온다. 시원한 음료수나 얼음물을 마시는 건 좋은데, 버리기에 너무 새 것 같은 플라스틱 용기나 잘근잘근 씹은 흔적의 빨대가 거슬린다. “아들아, 재활용 박스에 플라스틱 생수통이 넘치더라, 차라리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게 어때?” 최대한 교양 있는 목소리로 제안했더니,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아빠, 그거 친환경론자들의 왜곡된 주장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다시 물어봤더니 아들이 책 한 권을 내민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란 이름의 책에 따르면, 종이봉투나 소위 에코백(천연 면처럼 자연에서 분해되는 재료로 만드는 친환경 가방)보다 비닐봉지가 더 친환경적이란다. 종이가방이나 에코백을 생산하는데 배출되는 탄소나 소비되는 에너지가 검은 비닐봉지보다 더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도 그렇지 종이로 만든 건데 비닐 봉다리(!)보다 못할라고?싶을 거다.
종이가방이 정말로 친환경적이려면 적어도 44회 정도는 재활용해야 하는데,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종이가방도 일회용으로 쓰고 있는 현실이다. 비닐봉지만큼 쉽게 쓰고 쉽게 버린다. 문제는 종이 자체가 아니라 그 활용에 있었다.
‘결심했어, 자연보호 차원에서 앞으로 유리에 든 우유를 마시기로!’하는 사람이 혹여나 있을까 봐 하는 말인데, 유리병을 생산하고 재활용을 하자면 플라스틱 병보다 170~250%의 에너지가 더 소비된다고 한다. 제작 과정에서 200~400%의 이산화탄소가 발생되는 건 덤이고. 사실 유리병은 좀 독특한 게 변형도 쉽고 재활용의 기회도 많으니 자연 친화적일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유리가 삭는데 자그마치 일만 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유리병은 모래를 녹여서 만든다는 걸 환기해보면 이해가 쉽다. 모래가 썩거나 삭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따라서 유리병을 단순히 친환경적이다 할 순 없는 문제다. 현실은 그렇게 평면적이지 않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상업 광고가 제시하는 프레임을 너무 쉽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닌지 반성이 된다. 요즘 기업들치고 친환경 콘셉트의 제품과 이미지 캠페인을 안 벌리는 데가 없다. 지구를 구원할 것 같은 15초짜리 광고 속에는 온갖 과장과 왜곡이 도사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요구르트를 하나 살 때도 ‘바이오(bio)’나 ‘내추럴(natural)’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으면 왠지 건강해질 것 같은 기분에 그 브랜드를 집어 든다. 그냥 생수인데 청정한 알프스 산맥이 새겨져 있으면 저걸 마셔야 건강해질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긴다. 비싸기는 또 엄청 비싼데 말이다. 그런 나를 스위스 친구가 어눌한 한국말로 놀린다. “만년설이 녹은 물은 없어, 다 거짓말이야!”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이후로 겉표지만 보고 물건을 사는 습관은 버리려고 노력 중이다.
다시 아들이 건넨 책 이야기다. 북극곰이 슬퍼 보이는 표지(또 속았네!)의 책의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다. ‘환경을 지키고 싶다면 자연물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자연물의 (과한) 사용을 피하려면 인공물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이다. 탄소 배출량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전국의 울창한 숲과 나무를 베고 있다고 한다. 자연과 가장 친한 관계 맺기 방식이 무엇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현 정부나 환경주의자들의 지구 사랑법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적절한 거리에서 시간을 두고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