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의 무덤에 대해서 신라 및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신라 당시의 형편을 고려해보면 경주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명활산 동쪽 남촌마을에 있는 이 분묘와 관련하여 설씨 족보에 “묘월토산자좌(墓月土山子坐)”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산의 명칭에서 차이가 있지만 경주 단석산을 월생산(月生山)으로, 토함산을 월함산으로 부른 예가 있음으로 보아 명활산을 월토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글을 짓는 관리인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이라고 하는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설씨 문중에서는 시조인 설총의 확실한 무덤 위치를 몰라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30여년 전 어느 후손의 꿈에 할아버지가 현몽하였다.
“내가 보문리에 묻혀 있는데, 그 마을 이 아무 댁에 가서 물어보라”
다음날 보문마을을 찾아가서 꿈에서 지칭하는 이씨 어른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홍유후 설 선생 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있는데 관심이 있는 후손을 못 만나 이러고 있었는데 무덤을 찾아드리리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묘가 바로 현재의 설총묘이다. 리처드 레스택의 『두뇌운동』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전두엽에는 미래 기억을 담당하는 분야가 있다. 미래 기억이란 미래의 목표를 기대하고 마음에 품어 현재의 불편함이 미래의 목표를 이루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신경외과 의사가 되고 싶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노력해야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만일 힘든 수련 기간에 마음속으로 이미 신경외과 의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수월하게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을 꿈 바라보기 기술이라고 한다. 자신의 꿈을 마음속에 품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고 매 순간 간절하게 믿게 되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설총의 묘는 이를 찾아야겠다는 어느 후손의 간절한 ‘꿈 바라보기’로 묘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그대로 믿어야 할런지…… 전 설총묘는 전진평왕릉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423번지에 있으며, 1999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1168㎡이며, 묘의 지름이 15m, 높이는 7m로 원형봉토분이다. 묘의 아래로는 봉분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호석을 두른 흔적이 있다. 분묘의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경주 및 순창 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만들어졌으며 외곽에 철책이 둘러 있다. 상석은 경주지역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과는 차이가 있으며 묘비 전면에는 ‘弘儒侯薛先生諱聰之墓’라 씌여 있다. 안내판에는 ‘전홍유후설총묘’라고 ‘전’자를 붙여 피장자가 확실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 이 묘는 경주 ‧ 순창 설씨 대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왕릉이 아니고 신라인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은 옥녀봉의 김유신장군묘, 서악의 김인문묘와 김양묘, 황성동의 김후직묘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피장자가 이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모두 묘 앞에 ‘전(傳)’자를 넣어 전김유신묘 등이라고 한다. 이곳 설총묘도 예외는 아니다.중국 한나라 때 한영(韓嬰)이 지은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이런 구절이 있다.往而不可追者年也(왕이불가추자년야)흘러간 세월은 쫓을 수 없고去而不見者親也(거이불견자친야)가버린 부모는 다시 볼 수 없다. 원효가 죽자 설총이 그 유해로 아버지의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설총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를 올릴 때마다 소상이 돌아보곤 했는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당시까지 원효의 소상이 돌아보는 모습으로 있었다고 했다.
아마 설씨 후손이 이 묘소를 참배하면 『한시외전(韓詩外傳)』의 위 구절과는 달리 설총을 돌아보던 원효처럼 설총이 무덤에서 나와 후손을 내려다 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