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눈 성운*
나온동희
우주의 등고점들이 연결되고연결되어 퐁퐁다알리아 만발한손바닥을 본다손바닥을 바라보는 일은단 하나의 슬픔을 응시하는 것TV속의 한 아이가 오디션의 심사평에갓 구운 빵처럼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나의 왼손은 시리얼을 들추어 보다가허풍스러운 그 중 하나를 놓치는 순간이다어제 사랑스러운 루루가 죽었다한 장의 종이에도 기록되지 않을 무성한 슬픔이 허공에 빛나고오늘 아침엔 가판대에서일회용 잡지를 집듯 간단히그것을 잘라버렸다그러므로 내일 아침부턴 슬픔이 없을 것이다이것들의 근성은 처음부터 슬픔이 아니었을 것문은 닫아야만 나타나는 낡은 방 내부의야광들은 한때 나의 위로였으나손가락 사이로 흘러지금은 창문들이 별 몇 송이를 내어놓고 저녁이 되는 시간내 손바닥 중심에는다알리아 붉은색을 밀어내면서날 응시하는 루루가 살고 있다
*3천 광년 너머에서 사라지면서 마지막 짧은 광채를 내뿜고 있는 천체
-고양이의 눈, 천체에 어리는 슬픔
꽃다운 이십대 딸을 잃고 식음을 전폐한 어머니를 보았다. 몸을 가눌 길 없이 흔들리던 그녀는 그림을 그리러 학원을 나가고,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런 행위는 슬픔을 피하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은 붉은 고통이 아니라 소중하고 간절한 기억과 겹쳐져 걸러져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가 그렇다. “사랑스런 루루”라는 고양이의 죽음은 사망진단서 같은 “한 장의 종이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으로 해서 더 오래 기억될 만한 슬픔이다. 그것은 “시리얼을 들추어 보다가” TV 속 한 “허풍스러운 하나 놓치는 순간”과 같이 부지불식간에 생긴 일이다. 안고 있던 고양이가 한 눈 파는 사이에 내 실수로 사고가 난 걸까? 그러기에 그 슬픔은 “일회용 잡지를 접듯” 간단히 잘라버릴 순 없다. 그 사고 이후 화자는 문을 닫고 방안의 야광에 위로를 받는 시기를 거쳐 창문 넘어 보이는 “별 몇 송이”를 지나, 고양이 눈 성운을 만나면서 내면의 고인 울음을 걷고 안정을 가지기 시작한다. 우주의 축소공간인 손바닥엔 아직 내 안의 울음, “퐁퐁다알리아가 만발했지만” 루루는 “다알리아 붉은색을 밀어내면서” 아직도 날 응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먼별은 나의 정념의 균형추 같은 게 아닐까?
우리의 슬픔도 생명체에 대한 연민이나 죄의식을 덧붙이는 일을 넘어, 안쪽에서 핏기를 다 가셔낸 것으로 정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고 이 시는 슬며시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