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부친 남용만(南龍萬)과 모친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의 따님 사이에서 보문리에서 태어났다. 8세에 이미 「19사략(十九史略)」을 익혔고, 24세에 원조팔잠(元朝八箴)을 지으며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30세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며 벼슬길을 열었고, 1790년 43세에 예조 좌랑이 되었지만, 이듬해 여름 파직당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암곡동(暗谷洞) 지연(止淵)에 다섯 칸 집을 짓고, 계정의 수려한 산수에서 신선의 경지와 전원생활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1792년에는 여러 벗들과 단석산, 주사암(朱砂山) 등을 두루 유람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단석산(斷石山:월생산)은 경주의 서쪽 건천읍에 있는 산으로, 김유신의 신검(神劍)과 화랑들의 수련 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을 구해다가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하였고, 칼로 벤 돌들이 산더미처럼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신선사[단석사]와 상인암(上人巖) 그리고 마애불상 등이 있으며 신라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치암은 지역의 어르신들과 건천의 단석산에 올라 그 소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 역시 경주에 머물며 지역의 명산을 오르고 싶었으나, 과거 합격 후 타향의 관직생활로 인해 그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우연히 일행을 따라 단석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김유신의 전설 외에 단석산의 단석(斷石)에 얽힌 다양한 얘기 가운데 원효의 ‘해동원효 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역시 단석산에 머물렀던 원효의 고마움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며, 치암이 살았던 당시도 괴이한 이야기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유단석산기(遊斷石山記) 임자년(1792) 늦가을 갈곡(葛谷)의 70세 노인이 대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서 명활산 아래를 지나며, 나에게 “단석산 주사암은 우리 고을의 명산이다. 친구인 자네는 나를 따라 유람할 생각이 있는가?”라 하셨다. 나는 “30년 동안 보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어르신의 명이니 감히 사양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향리의 여러 공들과 따르는 무리들 절반은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분들이었다. 서악서원에서 나아가 저녁에 장흥사(長興寺)에 이르렀다. 절은 단석산 아래 넓은 골짝의 평평한 곳에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수목이 가려 그늘졌다. 나는 노전(爐殿:숙소)에서 묵었다. 작은 우물이 긴 행랑 가운데 있는데 매우 차가웠고, 물을 길어 부처 앞에 올리는 쌀을 씻는데 사용한다고 하였다. 스님은 나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로 엿과 감을 가져와 밤새도록 얘기 나눴다. 열엿샛날의 맑은 경치는 좋았다. 밝은 달은 계곡 따라 오르니 종종 드리워진 붉은 산수유가 보였고, 중양절 산수유를 머리에 꽂는 풍습을 모방할 만하였다. 남쪽으로 1리쯤 가 꺾어져 오른쪽으로 돌면 두 물줄기가 합하는 곳에 이르는데, 물과 돌은 기이하고 조용히 앉아 잠시 쉬었다. 갈옹께서 힘들어 오르지 못하고 백련암(白蓮菴)으로 들어가고, 76세 이하의 노인들은 모두 올랐다. 머리를 들고 200여 보를 가다가 보통 걸음으로 북쪽으로 꺾었다. 스님이 나와 맞이하였다. 석벽 아래 10여 보를 가면 나무다리가 하나 있는데, 몸을 움츠리고 건넜다. 다리를 지나 수십보 가니 단석암(斷石庵) 승사(僧舍)가 있었다. 암자는 석벽을 등지고 깎아지른 험한 골짜기에 있는데, 매우 고요하고 광활하며,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형세가 막혀 보이는 것이 없고, 오직 동남쪽 금오산 여러 봉우리가 보이고, 빽빽이 모여든 산봉우리는 머리를 숙여야 될 정도였다. 법전은 암자 북쪽에 있는데, 석벽은 더욱 깎아지고 굽이져 그 북쪽을 지나는데, 스님은 북대(北臺)라 하였다. 북대 위에는 높이가 1장쯤 되는 작은 탑이 있는데, 서리 맞은 단풍 7,8그루가 성글게 서 있으니 매우 기이하였다. 짙은 다홍빛이 사람을 비춘다. 그 북쪽에는 굴이 있는데. 김유신 장군이 검술을 연마한 곳이라 한다. 검고 깊어서 들여다볼 수 없었다. 대개 산사람들이 숨어 사는 기이한 곳이라 한다. 이곳의 최고 경치를 뽑으라면 법당이 최고이고, 다음으로 스님이 거처하는 곳이다. 옛사람은 불상이 자리한 명산이라 하였으니, 이 말에 믿음이 간다. 돌아와 승사에 앉아 창을 열고 진실로 오랫동안 고요히 바라보았다. 내가 취한 것은 고요하고 아름다워 머물며 살고 싶은 곳이고, 원효가 소반을 던져 바위가 쪼개졌다는 것은 비단 관찰할 필요도 없고 또한 기록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선사도 괴이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백련암에 이르렀는데, 백련암은 사방이 막혀 경관이 없었다. 스님이 국수를 내어왔다. 늦게 내원암(內院菴)으로 돌아왔다. 내원암 역기 기이한 곳으로, 남쪽에 비단 병풍[취병(翠屛)]을 둘렀고, 취병 아래에 기이한 바위가 있다. 맑은 샘이 날아 떨어지는 물소리는 듣기 좋았다. 암자의 서쪽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데 대나무가 드문드문 그 위에 자란다. 나는 조사(祖師)가 사는 방에 묵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여러 공들이 밤새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노인의 건강에 대해 감사하였다. 다음날 주사산(朱砂山)으로 향하였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