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는 광복이 기쁨을 주는 날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날을 위해 피 흘린 선혈들을 떠올리며 경건함을 지니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것이 무려 75주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항일독립운동가들은 본인은 물론 후손들조차 제대로 우대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주가 기억해야할 독립운동가이고 묘소가 내남면 노곡리에 있지만 시민들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독립운동가가 박상진(1884-1921) 의사다. 박상진 의사는 독립운동사에 가장 유명한 단체인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냈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이 2대 총사령이다. 그는 울산 천석지기 장자인데다 양정의숙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그야말로 앞길이 탁 트였다. 그러나 스승인 왕산 허위 선생의 영향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미 이후 만주를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박의사는 친일부호 장승원,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의 서도현, 보성의 양재학 등 악질친일파들을 대한광복회의 이름으로 척살하며 독립운동의 불을 지폈다. 유명한 경주우편마차 습격사건도 박상진 의사의 독립 운동 일화다. 그러나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집에 들렀다가 일경에게 잡혀 1921년 8월 11일에 사형이 집행됐다.
박상진 의사는 마지막 경주 최부자인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의 자형이기도 하다. 최준 선생과 백산 안희제 선생 사이에 있었던 복면강도사건, 백산이 밤에 복면을 하고 문파 선생을 위협해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냈다는 일화가 사실은 박의사의 문파선생 사이에 있었던 일이 와전된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 그렇듯 박상진 의사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큰 고통을 남겼다.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해 시신을 처가인 경주최부자댁 일가의 선산에 썼다. 또 그 아들은 제대로 공부도 못하다 일찍 사망했고 손자에 이르기까지 가난이 되물림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박의사가 처단한 친일파 장승원의 후손들은 둘째 아들 장직상이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셋째 아들 장택상은 유학을 마친 후 돌아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뒤에 국무총리를 지냈다.
마침 이남희씨가 페이스 북에 광복절을 맞아 울산박물관에서 박상진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는 기획전을 연다는 소식을 올렸다. 늘 박상진 의사에 대해 관심 가져온 이남희씨라 이 내용을 올리셨을 것이라 여기며 박상진 의사에 대해 궁금하실 분을 위해 간략하나마 소개했다. 12월 19일까지 열리는 기획전이니 천천히 다녀오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