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망사레이스 걸치고 한여름을 달구던 망초꽃들이 시나브로 하얀 띠를 거둔다. 뙤약볕에 간지럼 타며 솎아낸 배롱나무 도드라진 꽃분홍색도 차츰 빛깔을 감춘다. 입추(立秋)를 거쳐 처서(處暑)로 들어서는 가을어귀에 선뜻 하늬바람이 묻어난다. 사회적 거리를 두며 안부가 궁금한 사람들, 코로나백신 접종 여부를 묻고 묻는다. 참고 견디는 틈새로 인내의 시간들이 자취 없이 빠져나가길 기도하는 요즘이다. 효의 은혜를 심은 불국사, 108배 번뇌로 절하는 어머니마음 경내에 머물러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상흔을 쳐 매고 있는 기단석엔 그을음이 거무튀튀하다. 대웅전 양옆날개로 반듯한 익랑(翼廊)에 서서 무설전(無說殿) 현판을 곱씹는다. 능가경에 ‘무설’을 설명한 부처님 말씀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내가 손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손 끝을 본다” 손가락으로 하늘의 달을 가리키면 오묘한 달의 형체는 보지 못하고 손가락 끝만 보는 어리석음을 설법한 것이다. 진정한 진리란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써 마침표를 찍는다. 무설전에는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이 모셔져있다. 오른손엔 부처님께 중생을 서원한 지옥문 부수는 석장을, 왼손엔 어둠을 밝히는 명주를 들고 있다. 신라 성덕왕 맏아들로 태어나 1300년 전 당나라에 건너가 고승이 된 김교각스님이다. 열반 때까지 안휘성 지주부 청양현 구화산 화성사에서 수행과 중생구조로 정진했다. 입적 시 석함에 넣어 3년 후에도 썩지 않은 육신에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되었다. 1997년도에 구화산 지역 불자들의 성금으로 김교각스님 1300주년 기념일에 불상을 제작하여 불국사에 기증했다. 지장보살 김교각(김지장)스님이 중국에 가져간 5가지 품목이 귀히 여겨진다. “선청”이라는 삽살개, “오차송”이라는 잣나무 씨앗, “조” 씨앗, “황립도”라는 볍씨, “금지차”라는 녹차 씨앗이다. ‘금지’는 김지장 보살의 줄임말이며 부처님 도량을 ‘금지’라고 일컫는다. 1300여 년 전 김교각 스님이 가져가 구화산에 심은 신라 금지차가 신비롭다. 지금도 구화산 노호동 일대에는 옛 차밭이 남아있고 생산 된 차를 ‘금지차’라 부른다. 회랑을 거쳐 뒷문을 나오면 높게 마주치는 낙가교다. 볼 관(觀), 소리 음(音), 관음전이다.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심중을 꿰뚫어 보는 혜안의 십일면관세음보살이다. “고통 받는 중생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그 음성을 관하고 고통에서 면하게 해 준다.” 어릴 적 할머니는 일상의 희노애락(喜怒哀樂) 첫마디 끝 절마다 ‘관세음보살’ 염불을 달고 사셨다. 천개의 손바닥에 천개의 눈을 가진 탱화를 배경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은 살아있는 중생들의 소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이다. 일일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속사정을 살펴주는 관세음보살이다. 간절한 기도의 몫을 들어주는 위안을 불국사 천년고찰이 품고 간다. 힘겹게 오른 낙가교층계다. 숨 돌리기에 때 맞는 담에 서면, 하늘둘레 소나무 청정한 지붕사이 다보탑상륜부 조영이 아름답다. 중간담벼락 샛문 아래층계를 밟고 내려가면 맞배지붕의 비로전이다. 비로자나 부처를 모신 사찰을 화엄사찰이라 한다. 불국사도 최초에 화엄불국사로 불리었다. 인도 말 비로자나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진리의 빛이다. 삼천대천세계 수많은 부처 중에 가장 으뜸인 부처가 비로자나부처다. 대적광전 현판은 고요한 가운데 진리의 빛이 가득 찬 곳이란 뜻을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 중 2개가 불국사에 있다. 비로전에 안치된 비로자나금동불⦁극락전 불상인 아미타금동불이다. 그리고 나머지 1개는 백률사에서 출토된 약사여래입상금동불상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에 전시돼있다. 비로자나불은 엄지와 집개손가락이 위 아래로 맞물려 꼭 쥔 수인을 가슴으로 모은 ‘지권인’ 자태다. 하늘과 땅, 부처와 인간, 생과 사, 깨달음의 진리에서 하나라는 이치를 뜻한다. 법등명(法燈明)⦁자등명(自燈明) 부처님 설법에 깨달음을 구하고, 자기 자신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수행으로 내 안의 부처를 찾아 스스로 밝혀내는 진리를 감당하기 벅차다. 비로전맞배지붕 양쪽 끝 꼭대기로 치미기와가 당당하다. 올빼미 치(鴟), 꼬리 미(尾), 올빼미꼬리형상의 기와다. 올빼미는 눈을 감고 잠을 자지 않기에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의미와 화재예방을 암시한다. 비로전 뒤꼍은 불국사경내에서 가장 한적한 공간이다. 사철 아늑한 기운에 고요롭다. 법당기단석엔 밟고 오르는 돌층계도 없다. 수행의 마침표를 찍고 진리의 빛에 장엄한 꽃봉오리로 안기기 때문이다. 비로전 영역엔 보물로 지정 된 참한 부도가 사연도 서럽게 얹혀산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무덤이다. 스님의 사리를 보관한 부도의 위치는 대부분 절의 입구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불국사 부도는 일본으로 밀반출 되어 여기저기 떠돌다가 1933년 반환되었다. 그래서 다시는 도난의 아픔이 도래하지 않게 불국사 영역 가장 안온한 곳에 보물로 보호되고 있다. 단아하고 아담한 자태로 빛을 발했을 부도다. 바다건너 강제로 보쌈당한 파란만장한 자취로 상처의 굴레가 심하다.
부도형식은 구름모양이나 안상모양 기법으로 통일신라 후반기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 작품으로 해석된다. 중대석엔 구름이 승천하는 기상을 조각했다. 하트모양 도톰한 연꽃잎 귀 세운 잎사귀 마다, 둥근 모양을 조화롭게 안치해 놓은 앙련봉오리 연화대좌에 4개의 감실이 얹혀 있다.
무릎을 굽히고 상륜부 안쪽 밑을 살피면 세 겹 연잎 활짝 피어나 있다.
감실의 부처도 보살도 입 꼭 다문 사연 품고 가는 세월이 미심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