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재가 만나서 불이 되었다                                                             이중기 박성근은 퇴각하는 영천전투에서 탈영해 북으로 간 보도연맹 쌍둥이 박장근으로 살았다갈대 발목 부여잡고 우는 물소리가 수척해지는 늦가을 갈 데 없는 홀몸 스무 살 형수가 가만히 몸, 받아주었다재와 재가 만나서 불이 되었다 휘영청 산 넘어 죽장두마, 골 깊은 화전민 초막에 솥단지 걸자기우는 추녀 끝을 산꿩이 팽팽하게 잡아당겨 주었다 그 가시버시 아들 다섯 낳아맏이에게 형님 제삿날 물려주었다 이 산전수전에 돌 떨어진다면 세상이 아프다 -숨겨진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민초들의 예지 이중기의 시를 읽으면 이름 없이 살아온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지역의 근현대 민중사다. 그것은 때로는 민중서사시로 드러나기도 하고, ‘만인보’ 형식으로도 차용이 되었다. 그 모두가 시인이 발품을 판 끝에 어렵게 채록해낸 이야기가 원재료가 되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 시도 그동안 잊혀져 있었던 숨겨진 민초들의 절박한 삶, 한 가족의 말 못할 사연이 절절이도 스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가 그들에게 입힌 아픔마저도 너끈히 다스려 나가는 민초들의 예지를 만난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운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조직한 반공단체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 후퇴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이 단행되었다. 목숨부지를 위해 “북으로 간 보도연맹 쌍둥이 박장근”의 일도 그때 였으리라. 문제는 쌍둥이 동생 박성근도 “퇴각하는 영천전투에서 탈영”한다는 것이다. 월북과 탈영, 당시엔 얼마나 섬뜩한 죄목이었을까. 그러나 동생에겐 생존의 절박한 문제가 있었던 거다. 그에게는 “갈 데 없는 홀몸 스무 살 형수”를 돌보아 후손을 잇겠다는 속내가 있었고, 스무살의 형수도 그 뜻을 아는지 “가만히 몸, 받아”준다. 그들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재와 재가 만나서 불이” 될 수도 있는 법. 그들은 이미 재가 된 인생이었지만 재 속엔 아직 불탈 무언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불은 삼키거나 태우는 불이 아니라, 생명의 불이요 소생의 불이다. 그들은 세상의 이목을 피해 “두마. 골 깊은 화전민 초막에 솥단지”를 건다. 그들이 완전한 산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은 “기우는 추녀 끝을 산꿩이 팽팽하게 잡아당겨 주었다”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때 산꿩은 인간의 형편을 깊이 헤아리는 슬기로운 새로 나온다. 삶의 지극성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그들의 삶이 진정 빛을 발하는 건 5연이다. “아들 다섯 낳아/맏이에게 형님 제삿날 물려주었다” 가족 질서가 비로소 탄생되고 재편된다. 맏이에겐 형님의 제사를 물려줌으로 대를 잇게 하고, 그들은 그들대로 자신의 후손을 이어가는 대의와 예지가 여기 있다. 쌍둥이 형이 없이도 두 사람의 의지로 인해 두 가문이 보존되는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은 끝부분에서야 자신의 판단을 약간 덧붙인다. “이 산전수전에 돌 떨어진다면 세상이 아프다” 함부로 돌 던지지 말라,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험악한 세상, 역사의 문제라는 말이다. 당해보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는 민초들의 삶이 역사의 뒤편에는 얼마든지 있다. 시인의 노력으로 우리는 그 사실의 일단이나마 어루만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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