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삼아 공원에 나가보면 반려동물과 함께 나온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얼굴이 작아서일까 커다란 모자에 커다란 마스크를 쓴 아가씨도, 커플룩에다 동그란 얼굴마저 닮으신 노부부도 반려견과 함께 걷는다. 코로나로 사람 사이의 거리 유지가 더없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본능과도 같은 인간의 관계 지향성을 막을 수만도 없다.
공원에서 보는 광경은 한결같다. 반려동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식 대하듯 한다. 당연히 반려(伴侶)이기에 그들은 짝이며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다. 다리를 살짝 저시는 어르신은 오늘도 까만 치와와를 품에 안고 산책 중이시다. 다리 아프다고 칭얼대는 손주를 안고 달래주는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일본 요양원에는 외로운 어르신들의 말벗으로 로봇을 활용하기도 한다. 개, 거북이나 로봇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공통점은 간단하다. 서로 마음을 나눌 관계면 충분하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반려 관계라고 예외는 없다. 반려동물의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이다. 아픔이나 고통은 인간에게 있어 매우 독특하다. 가령 손가락이 잘릴 때와 애인이 떠날 때의 고통을 비교해봤더니 별로 차이가 없더란다. 뇌 영상 사진으로 확인을 해봤더니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인 그것이나 동일한 뇌 부위가 반응을 하더란다. 5년을 같이 했던 동물이나 50년을 같이 해왔던 사람의 부재도 감당할 고통은 같다. 대상에 상관없이 우리 존재의 항상성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 고통을 두카(苦: dukkha)라고 한다. 이빨이 아프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육체적 고통은 병원이나 약국에서 해결할 문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존재의 특성으로 늘 바뀌는, 변화하는 의미를 뜻한다. 내 모친의 표현을 빌어 정의하자면 바로 ‘히딱버딱하는’ 성격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게 변한다. 한때 풍성했던 내 앞이마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파일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8살 아들 녀석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지금은 무슨 말만 해도 무뚜뚝하게 “응, 아니야” 그런다. 자기 전 양치 좀 하라고 애원을 해도 반응은 “응 아니야”다. 닦겠다는 건지 안 닦겠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불교식 고통은, 인간 존재와 그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다. 예외가 없다. 태생적인 한계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고(苦)의 속성을 고급지게 표현한 것이 무상이다. ‘항상(常) 하지 않는다(無)’는 무상은 본질(本質)이 아니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다. 본질은 불변이고 진실할 테니 말이다. 우리가 꿈꾸는 사랑은 영원한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니까 그런 거라 믿고 싶지만 주제는 한결같이(!) 바람을 피우고 변심하며 또 다른 사랑을 꿈꾸는 내용이다.
그럼 진리는 어떤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흑인이나 당뇨병 환자, 왼손잡이 등 온갖 조건을 가리지 않고 동일 적용 가능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본질이고 진리일 테다.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유를 가리키며 “이건 빨간색이 아니야”하는 부정은 “당연히 흰색이니까”라는 긍정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말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환기하는 이유는 “눈앞의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마, 그건 본질이 아니야”라는 말이다. ‘히딱버딱’ 변하는 그것이 영원하길 기대하고 그러다 또 속상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하고 개(그레이하운드)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더니 사람이 한 번도 이기질 못하더란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는 그저 냅다 달리기만 하니까 그렇다. 반면에 100미터를 뛰는 순간에도 사람 마음은 끊임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잡생각)’하면서 에너지를 허투루 써버린다.
이렇게 인간은 고통에 무릎 꿇어야 할 운명인가? 영국의 마라톤 선수 폴라 래드클리프(Paula Radcliffe)는 42.195km를 뛰면서 딱 100까지만 세었다고 한다. ‘결승점까지 얼마나 남았지?’, ‘내 뒤에 누가 따라오지?’ 끊임없이 에너지를 갉아먹는 ‘두카’를 막기 위해 차라리 개(!) 같은 전략을 쓴 거다. 그녀는 그렇게 2005년 월드 챔피언십, 뉴욕 및 런던 마라톤에서 세 차례 우승한 최초의 여자 마라토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