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이제껏 많은 책을 읽으며 살아 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책 내용은 물론 제목조차 희미할 때가 많다. 하지만 까뮈의 <이방인>만은 40년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책과 관련된 추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열 몇 살 그 무렵은 서로 주먹질도 하고, 술과 담배도 배우고, 짝사랑하는 여학생도 생겨나던 참 좋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머리에 갓 돋은 뿔이 간질간질하여 뭔가 들이박고 싶은 것들이 많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절 그나마 내가 제일 잘한 것은 교내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다. 3교시 때부터 도시락 까먹고 점심시간 땡 하자마자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읽었다. 학교공부와 시험은 뒷전일 만큼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섭렵해가며 열독 했다. 도서관에서 못다 읽은 책은 수업시간에 들고 와서 뒷자리로 자리를 바꿔 앉아가며 책을 읽을 때였다. 수학 선생님이 던진 분필토막이 내 머리를 명중시켰고 교실에는 웃음들이 넘쳐났다. 내 이름을 부르고 질문을 하는 것도 모른 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읽은 책이 바로 까뮈의 <이방인>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뫼르소, 해변에서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죽인 뫼로소, 감옥으로 찾아온 목사를 내쫓는 뫼르소가 내 몸속으로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 무렵 고향마을 앞집에 사는 친구가 싸움하다 대구 청소년감호소에 수감 중이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부모 도움을 받지 못한 그는 그곳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쩌면 그 친구가 뫼르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면회 갈 목적으로 배 아프다 거짓말하고 조퇴를 했다. 책가방은 분황사 보리밭에 숨겨두고 면회 가서 빵 하나 건네주고 왔다. 이처럼 이방인을 읽은 무렵의 추억들은 오롯이 <뫼르소를 처음 만나던 시절>이라는 졸시를 쓸 수 있었고 문예지에 발표까지 했다. 졸시는 다음과 같다. 너를 처음 만나던 그 때, 담배를 배워 물기 시작했고 강둑에 앉아 별을 향해 소주병 나팔을 불며 보리밭 네발로 기는 법과 구토를 배우던 중이었다 그리고 간혹 몽정을 경험하던 때//
돈 벌러 간 삼촌이 객사하여 돌아오고, 잠 못 드는 할머니 곁에 누워 소리 없는 강물의 속력과 수심 깊이 가라앉기만 하는 끝없는 물방울소리를 들을 때 너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하품하며 졸던 오후의 윤리시간 너는 바닷가를 거닐다가 문득 마주친 햇. 빛. 때. 문. 에. 쏜 총알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만 같던 순간, 정확히 내 머리통을 명중시키는 선생님의 분필토막 교실바닥엔 붉은 피 대신 웃음의 파편들이 쏟아지던 그 시절 나를 가르친 것은 선생님이 아니라 바로 너였는지도// 배 아프다 조퇴하고 보리밭에 책가방을 숨겨두고 소년원에 간 옆집 친구에게 빵 하나 건네주고 돌아나올 때 담 밖 열흘보다는 담 안의 한 시간이 더 나를 살게 한다는 네 혼잣말이 미류나무 잎사귀로 반짝거리기만 하던 까까머리 그 시절엔 서부영화가 재미있었고 총 쏘는 법과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국화가 필 무렵엔 담배를 가르쳐 준 놈보다, 담배를 더 잘 피웠고 새우깡을 안주로 해서 술을 마신다면 아버지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양이처럼 햇볕을 쬐는 일과 생쥐처럼 어둠속으로 숨어드는 버릇이 생겨났다 때때로 시를 쓰고픈 마음이 포롯포롯 돋아나던 뫼르소, 너를 처음 만나던 그 시절//
세상은 아직도 열 몇살 그 시절 알 수 없는 너다 (뫼르소를 처음 만나던 시절 全文)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주위에서는 그대만이 쓸 수 있는 영역의 시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미적분 풀고 영어단어만 외며 부모님이 원하고 선생님이 바라는 모범적으로만 살지 않은 것에 대한 우회적 표현일 것이다. 이후에도 <시지프스>를 비롯하여 까뮈의 책들을 찾아 읽었다. 특히 <나는 다시는 자살을 꿈꾸지 않으리라>는 밑줄 그어가며 읽었고 지금도 서재에 꽂혀 있는 아끼는 책이다. 소설<이방인>은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늘 문학 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도록 만들어준 소설이다. 책 속 주인공 뫼르소는 부조리한 세상에 시가 필요하다고 늘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문학동네에서 지금껏 시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책이다.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어느 시기에 어떤 책을 읽느냐도 참 중요한 것 같다. 시원하게 뒤통수를 갈겨 줄 수 있는 그런 책, 누구나에게 한 권쯤 있었으면 좋겠다.
-전인식 시인 : ‘97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98 불교문예 신인문학상, 제 5회 불교문예 작가상, 통일문학상, 선사문학상 외 다수 수상.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속>, <검은 해를 보았네> 전자시집 <고약한 추억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