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견대(利見臺)는 경주부의 동쪽 50리 해안(海岸)에 있고, 이견대 곁에 이견원(利見院)이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 아래 10보(步) 바다 가운데 바위가 있는데, 네 모퉁이가 네 문처럼 우뚝 솟았고, 이곳이 문무왕을 장사지낸 곳이다. 지금까지 대왕암(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臺下十步 海中有石 四角聳出如四門 是其葬處 至今稱爲大王巖). 그리고 문무왕이 유언하기를 “산곡(山谷)은 변천하고 세상은 바뀌는 법이다. 오왕(吳王) 북산(北山)의 무덤에서 누가 금부(金鳧)의 광채를 보겠으며, 위주(魏主) 서릉(西陵)의 망견(望見)도 오직 동작대(銅雀臺)의 이름만 전할 뿐이니, 공연히 인력만 수고롭고 유혼(幽魂)을 구제하지도 못한다. 동해 어귀의 큰 바위 위에 화장하여라(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誰見金鳧之綵 魏主西陵之望 惟間銅雀之名 空勞人力 莫濟幽魂 火葬東海口大石上.『무명자집』「영동사(詠東史)」)”라 하였으나, 문무왕의 장사(葬事)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호국용(護國龍)의 전설이 담긴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그리고 이견대는 죽어서도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 문무왕의 정신이 깃들어 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부친의 유언대로 장사 지낸 뒤에 추모하여 대(臺)를 쌓았는데,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나 보였기에 이견대(利見臺)라 이름하였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동경유록」에서 이견대의 이름이 “아마도 신라왕이 『주역』건괘구오(乾卦九五)의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뜻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이견대와 관련해 신라시대 가요 「이견대가(利見臺歌)」 전하는데, 『고려사』·『증보문헌비고』에 제목과 제작동기가 전하지만, 원래 가사는 없다. 다만 조선후기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다시 회자된다. 특히 “신라왕 부자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서로 만나게 되자, 이 대를 쌓아 서로 만나 보았다. ‘이견대’라 하고, 이 노래를 지었다(羅王父子久相失 及得之 築斯臺相見 號曰利見 作此歌).”라며 신라 어느 왕을 가리키는지 알 수는 없고, 『여지승람』의 신문왕(神文王) 내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간재 이덕홍은 3차례(1580.1581.1591년) 경주를 유람하였고, 이견대에 이르러 “골짜기 건너 구름 뚫고 바닷가에 이르니, 우뚝 솟은 정자 하나 꽃다운 물가를 지키네(越壑穿雲到海頭 巋然一榭鎭芳洲)” 그리고 간재와 동일시기 인물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 역시 1582년 경주를 찾아 포석정과 이견대 그리고 옥산서원 등을 두루 탐방하였고, 「向利見臺過吐呑山 次佔畢齋金先生韻」등 시를 남겼으며, 모두가 우뚝한 정자를 보았으니, 당시 이견대에 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들이 본 정자가 이견원인지 이견대에 세워진 정자인지 정확하지는 않고, 게다가 현재 바닷가 앞에 세워진 이견대는 여러 문헌에서 말하는 이견대의 위치와 차이가 있어 보이며, 아마도 지금의 이견대보다 더 높은 곳에 이견대가 위치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1709~1773)는 1767년 경주를 유람하고 「유동도록」을 지었으며, 이견대와 문무왕의 호국용에 대한 소회를 유자(儒子)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비판하였다. 10월 20일. 새벽에 일어나 마을 뒤 작은 언덕에 올라 일출을 바라보니 엷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어 또한 동축사(東竺寺)에서의 경관과 같았다. 아침을 먹은 뒤 바닷가를 따라 20리를 가는데 넓고 끝이 없었다. 단지 보이는 것은 바람에 파도가 진동하여 하얀 물결이 허공에 치고, 고기잡이배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돛배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큰 고래가 삼키고 내뱉듯 세찬 파도는 산과 같고, 흰 새는 유유자적 날아다닌다. 기괴한 바윗돌이 파도 가운데에 다투어 솟아 있기가 창을 열지은 듯, 짐승이 엎드린 듯 자못 귀신과 같았다. 대왕(大王)이라 불리는 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문무왕은 왜구가 자주 침범함을 근심하여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보호하고 왜구를 방어하기를 맹세하였다.
때문에 유언으로 바닷가에 장사지냈다”라 한다. 아! 오랑캐를 막는 방책은 단지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적군을 물리칠 뿐이지, 이것을 하지 않고서 곧 용으로 변화해서 왜적을 막고자 하였으니, 허황되지 않은가? 신문왕은 간곡히 간하여 말리지 못하고 그 유언에 따라 이견대를 쌓아 대왕암을 바라보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날 해창(海倉)에 투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