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신화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가장 이상적인 왕을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 · 지배한다는 이 왕에는 금륜, 은륜, 동륜, 철륜이 있다. 진평왕의 조부인 24대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생각하고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동륜(銅輪), 사륜(舍輪)이라 하였다. 사륜을 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동륜의 아우가 금륜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하지만 사륜의 ‘사’는 쇠 즉 철 이고, 금(金)은 황금이 아니고 훈(訓)인 ‘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흥왕의 태자가 동륜이라면 동륜의 아우가 되는 진지왕은 철륜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동륜은 진흥왕 26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진흥왕 33년에 사망하였다. 『화랑세기』에서는 진평왕의 사랑을 받고 있던 보명궁주(宝明宮主)를 동륜이 연모하여 보명궁의 담장을 넘다가 개에 물려 죽었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윤리 기준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흥왕의 사후 동륜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사륜 즉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4년 후 진지왕이 죽으니 왕의 조카이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579년 왕위를 이어받았다. 진평왕은 신라 26대 왕으로 54년(579-632)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다. 시조 박혁거세 이후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진평왕의 휘(諱)는 백정(伯淨)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슈도다나’를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다(정반왕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마야왕비로 그 이름이 석가모니 어머니와 같다. 또 동생은 백반과 국반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숙부 이름과 같고, 왕의 딸로 후에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德曼)도, 불교의 경전에 있는 이름이다. 왕명인 선덕도 불경에 여러 명 나오는데 그 중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또 다른 딸인 천명부인은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김용춘과 결혼해 제29대 무열왕을 낳고, 셋째딸인 선화공주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백제의 30대 무왕과 결혼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기이」편 ‘무왕’조에 나온다.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장이 11척으로 몸이 장대하였으며, 내제석궁(內帝釋宮)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을 정도로 괴력을 가졌었다. 또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으며,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김후직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듣고 좋아하던 사냥을 그만둘 정도로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는 선군이었다. 즉위 후 관제를 정비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3년(581)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고 동왕(同王) 7년 삼궁[三宮: 대궁(大宮) · 양궁(梁宮) · 사량궁(沙梁宮)]에 사신(私臣)을 두었다. 또 43년(621)에는 왜전(倭典)을 고쳐서 영객전(領客典)으로 하였으며 다음 해(622)에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다. 또 남산성을 쌓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수도 방위에 힘썼다. 그 밖에 왕은 원광 · 담육 등 승려를 중국에 보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 진흥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수나라와 수교하였고, 수나라가 망하자 이어 당나라와 수교하였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평왕 즉위 원년에 선녀가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제(上帝)의 하사품이라며 천사옥대를 주었다. 이 옥대의 길이는 10위(圍)에 마디가 62개였다고 하며, 진평왕은 천지신령 혹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고 한다. 이 옥대는 ‘성제대(聖帝帶)’라 하여, 황룡사 9층목탑, 황룡사 장륙삼존불상과 함께 신라 3보로 여겨졌다. 진평왕릉은 사적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동쪽에 명활산성, 남쪽에 보문사터가 있으며, 남서쪽에는 낭산, 서쪽으로는 황복사지, 황룡사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다. 특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낭산에는 딸인 선덕여왕릉이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호석을 두른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 개만이 보인다. 왕릉 주위에는 소나무로 숲을 이루고 있는 다른 고분과는 달리 느티나무, 소나무, 왕버들, 백양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숲을 이루고 있어 최근에는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 찾는 사람이 많다. 이근직 교수 등 학계 일부에서는 이 고분이 진평왕릉이 아니고 신문왕릉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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