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있었던 일이란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선다. 웅~ 하는 엔진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고 때맞춰 벨트를 매라는 방송이 나온다. 모든 게 정상이다. 한 시간 후면 한국에 도착하겠지 싶었는데 아니, 비행기가 주춤하다가 서버린다. 이어 엔진 결함이 생겨 1시간 후 다시 출발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잠시 있다가 3시간 뒤 출발한다는 정정 방송이 나온다.
“어! 저걸 빼네?” 나직한 한국인의 목소리에 들려왔다. 비행기가 뜨기만을 기다리던 한국인들이 일제히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린다. 한국어에 당연히 한국 사람들만 반응한 거다. 창문 너머 공항 직원들이 비행기 내 수하물을 빼고 있었다. 아하! 상황 파악이 끝났다. 비행기가 오늘 안 뜬다는 걸 직감한 한국인들은 일제히 그러나 은밀히(!) 폰을 끄집어낸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가는 다른 비행기가 없나 마구 검색한다. 이런 사정을 알 길 없는 외국인들은 한가로이 책을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한국행 비행기는 취소한다는 알림 방송이 울린다. 공항 직원은 어설픈 발음으로 탑승객 이름을 확인하고 여권을 돌려준다. 일본인의 외국인 발음은 정말이지 심각한 수준이다. 발음을 잘못할 때마다 미안하다 고개는 또 얼마나 숙이는지. 이런 상황에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한국인은 없다. 성질 급한 어느 한국인이 자원해서 여권 묶음에서 짙은 초록색만 추려낸다. 각자 여권을 손에 넣은 한국인들은 또 일제히 달리기 시작하더란다. 먼저 결항 확인 도장을 받고, 짐을 찾은 다음, 다시 비행 티켓을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선착순이다. 잔인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한국인들만 제일 먼저 임시 항공 카운터에 도착,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무거운 짐, 캐리어, 정신없이 산만한 아이들을 데리고 말이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눈치 빠르고 속도도 빠른 한국인들이니까 가능한, 또 하나의 레전드다. 뒤늦게 온 외국인들은 대기자 접수가 마감되었다는 소리에 뜨악한 표정이다.
눈치나 그런 뉘앙스는 한국에만 있다. 영국 일간지〈데일리 메일:Daily Mail〉에서는 눈치(영어로 Nunchi라고 명명)를 한국 전통의 철학으로 삶, 직장, 사랑에서 성공하려면 꼭 갖춰야 할 열쇠로 소개했다.
‘눈치는 한국인만의 초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상대방 마음을 읽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고, 해를 끼치려는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본능적 육감’이라고 칭송했다.
가령 “오늘 바빠?” 하고 여자 친구가 물어오면 “우리 영화 보러 갈까?”하고 남자가 받아쳐야지, 곧이곧대로 “응, 바빠”하면 큰일 난다. 외국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눈치 문화는 한국이라는 고도의 맥락 사회(high-context society)니까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맥락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개성을 발휘하는, 정말 쉽지 않은 감정의 교류가 요구된다. 즉,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핀셋처럼 정확하게 집어내야 하는 사회이고 그렇게 발전한 게 눈치다. 그 힘든 걸 또 해내는 한국인들은 정말이지 대단한 민족이다.
사실 눈치란 게 만만치 않다. 눈치가 빠르면 보통 센스가 있거나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눈치가 너~무 빠르면 이기적이거나 약삭빠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긴다. 선을 넘지 않아야 중의적인 해석을 피할 수 있는, 눈치의 이중성이다.
코로나 피해가 심한 이탈리아 어느 언론에서 이런 글을 실었다.
“우리가 한국으로부터 배울 것은 감염자를 철저히 추적하고 신속히 검사하며 격리하는 방식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침범하지 말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눈치’가 있어야 한다”
기고문은 한국인의 눈치를 행동 규범 체계에 내재되어 있는 ‘정서 지능’이라고 정의했다. 마스크를 쓰는 게 나와 타인을 동시에 지키는, 정서적으로 똑똑한 행동이라는 거다. 한국에서 눈치 문화를 수입할 수 있다면 코로나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문제에도 귀중한 업적이 될 거라니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모처럼 놀러 오신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는데 그저 멀뚱 쳐다만 보길래 아들 녀석에게 눈을 부라렸다. 무엇이 잘못인지 전혀 눈치를 못 챈 아들이 왜? 뭐? 하고 오히려 ‘눈치’를 준다. 혼자 커서 저렇게 눈치가 없나 싶어 써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