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콘(Icon)’은 ‘이콘’이란 종교적인 상징을 뜻하는 중세 그리스어에서 비롯되었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중세 신앙인들을 위해 교회 내부에 조각을 새기거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 등을 그려 넣음으로서 종교의 이해를 돕는 장치들이었다. 절에 가면 법당 밖에 많은 탱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부처의 생애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한 이콘의 일종이다.
최한규 작가의 그림에는 최 작가만의 눈에 띄는 아이콘이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풍요로운 달과 연꽃이다. 청개구리와 새 혹은 비행기, 우주 등이 그 아이콘을 적절히 치장한다. 여기에 아이콘이라기보다 ‘트레이드마크(Trademark)’라고 부를 만한 요소로 경주의 다양한 유적이 있다.
7월 9일부터 15일까지 아산병원 갤러리에서 열린 최 작가의 18번째 개인전 ‘숨=空(공)’전에서 이들 아이콘들이 유감없이 빛났다. 특히 몸과 마음의 아픔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가족들이 들끓는 초대형 종합병원 로비에 설치된 갤러리인 만큼 이번 전시회는 최 작가뿐 아니라 환자들과 가족들, 아산병원에게도 전시의 의미가 각별했다. 누구에게나 쉽게 납득 되는 최한규 작가의 아이콘들이 보는 사람에게 따스한 행복과 희망, 그윽한 평안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경주 곳곳의 유적지들은 어려운 병마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연중 힐링의 도시로 기억됐을 것임에 틀림없다.
-달과 연꽃 소원과 희망·긍정의 메시지, 사람 이야기를 최한규 작가의 아이콘들에 살려 최한규 작가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콘은 달이다. 달도 그냥 달이 아니고 화면에서 가장 중요하고 넓은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소재이며 척 보기에도 풍만하기 이를 데 없을 만큼 휘황하고 탐스런 달이다. 각각의 장면에 따라 색이 다르고 크기나 위치도 다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묘한 황홀감과 편안함, 넉넉함을 안겨준다. 달 하나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행복함이 느껴진다. “달은 누구에게나 소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달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달 속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숨어 있기도 합니다. 제 그림에서 달은 그냥 달로서가 아닌, 우리들의 오랜 이야기, 그 중에서도 행복을 가득 품은 대상입니다”
작가의 설명을 다시 달에 적용한다면 달이 이토록 크게 그려진 것은 최한규 작가가 그만큼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그림을 통해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넉넉한 소망을 기본으로 그림 속에 담은 것이다. 때문에 그림 속의 달이 크면 클수록, 밝으면 밝을수록 최한규 작가가 전하는 행복의 크기는 그만큼씩 더 크고 밝아지는 셈이다. 주변의 우주가 띠는 다양한 빛과 몽환적인 배경에 따라 행복의 느낌과 깊이가 다각도로 변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림 속 연꽃 역시 누구나 공감하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진흙 속에서 피는 꽃인데도 어떤 꽃보다 굳세고 환하게 피는 연꽃이다. 굳이 불교적인 의미를 두지 않아도 연꽃이 주는 이미지는 맑고 참된 느낌이 물씬 피어난다. 아무리 환경이 나쁘고 형편이 어려워도 필 꽃은 핀다는 필연을 강조한 꽃이기에 이 역시 강렬한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 작가가 표현한 연꽃은 아름다운 최전성기의 모습만은 아니다. 봉우리만 그려진 연꽃이 있는가 하면 활짝 핀 연꽃도 있고 꽃잎은 다 떨어진 채 연밥, 씨를 품은 모습도 있다. 숫제 꽃은 사라지고 앙상하게 꺾인 꽃대만 남은 연도 눈에 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연꽃의 주기를 통해 사람의 일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래된 미래 경주 위해 ‘나 하나쯤’ 아닌 ‘최한규야말로’ 경주 그리는 작가 되어야 연꽃은 한편으로는 최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가거나 미술을 공부하기는커녕 실업계인 경주공고로 진학해 생업전선에 뛰어들기를 바랐던 부모님의 소원이 최 작가가 받아들였어야 할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미술부를 만나 치열하게 그림 공부에 메달린 끝에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완성한 최한규 작가의 미술인생은 지금쯤은 활짝 피어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연꽃의 시기가 아닐까?
“연꽃을 그리다보니 청개구리는 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또 다른 요소가 되었습니다. 연밭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동물이니 제 그림에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청개구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잖습니까? 천진난만 아이들처럼···요!”
최 작가의 말처럼 너무나 당연히 등장할 수 있는 청개구리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작은 개구리가 차지하는 위치와 모습이 그림의 판도를 바꾸는 가장 핵심적인 아이콘일수도 있다. 개구리는 연대의 밑둥을 온몸으로 붙들고 있는가 하면 연밥 위에 편히 앉아 태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놈도 있고 심지어 연잎을 타고 오르기 위해 필사의 힘을 쏟고 있는 놈도 있다.
이 개구리의 위치와 동작에 따라 그림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행복을 위한 욕망, 성취를 이룬 평안, 단단히 벼른 도전 등 그림의 해석이 영 딴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 대해 최한규 작가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림은 그린 사람의 의도가 반영됐지만 그와 별도로 보는 사람의 해석도 매우 중요하고 존중 받아야 합니다. 그림을 보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림이 가진 이야기가 풍성하다는 뜻이겠지요”
최 작가는 그림 속 또 다른 아이콘들에 대한 애정도 깊다. 자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잠자리와 까치, 후투티, 솔개 등 다양한 새, 달 속에서 유영하는 듯한 비행기는 꿈과 이상(理想), 어떤 면에서는 욕망을 나타낸다고 소개한다. 역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같은 공간’ 상의 날짐승들이 화면에 긴장감과 변화를 불어넣는다. 그래서인지 이 작은 장치들은 그림을 보는 관객들이 재미를 느끼며 잠시 쉴 틈을 주는 요소로도 손색이 없다. 사소한 이 장치들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그림이 갑자기 답답해지고 무언가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듯 허망함에 빠질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경주사람 눈에는 최 작가에게서 유난히 눈에 띄는 소재가 ‘경주’다. 이번 전시회에 등장한 경주만 해도 양동마을, 봉황대, 운곡서원, 월정교, 다보탑과 석가탑, 동궁과 월지 등 다양하다. 최한규 작가 그 자신 ‘작가의 태생지’라 할 수 있는 계림도 당연히 함께 등장했다.
“제가 고교시절 처음 이젤 받치고 대상을 그린 곳이 계림입니다. 그때부터 계림은 단순한 그림의 대상이 아닌 제 작품세상의 근원적 출발지로 거듭났습니다. 그 후로 쭉 경주에서 살아온 작가로서 제가 살아가고 앞으로도 살아갈 경주를 그리는 것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출신의 많은 미술인들이 있지만 저 하나쯤은 경주를 열심히 그리는 작가가 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깁니다”
마침 경주 대릉원 담장길에 설치된 타일벽화에서 최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것이 기억났다. 경주를 그리는 다양한 화가들이 있지만 최 작가처럼 내놓고 경주를 소재로 삼아 꾸준히 그려온 작가는 최 작가가 유일할 것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 최한규 작가는 요즘도 흔히 경주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구석구석의 경주를 탐방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한다고 고백한다. 그 지난 2020년에는 16번째 개인전으로 인사동의 ‘갤리리 이즈’에서 경주를 테마로 ‘숨-오래된 미래’전을 열기도 했다.
다수의 아트페어를 비롯, 2002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매년 한 번씩은 어떻게 하건 개인전을 열어왔을 만큼 치열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최 작가는 경주미협에서의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한편 황리단길 문화산실로 떠오른 갤러리란에서 미술관장 역할도 맡고 있다. 특히 화랑로에 아트인 미술학원을 열어 미술대학 진학을 꿈꾸는 미술학도들을 가르치는데도 혼신을 다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행복을 전하는 최한규 작가인 만큼 그가 봉사하는 미술단체와 그가 지도하는 미술학원이 어떤 활력을 가지고 운영될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 작가가 꿈꾸는 ‘오래된 미래 경주’는 최 작가의 주제 속에서처럼 쉽지 않다. 경주가 ‘오래된 미래’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적 못지않게 현대의 예술문화가 다채롭고 왕성하게 덧칠되고 내일의 꿈을 키울 인재들도 자라야 한다. 그래서 더욱 오늘의 경주를 그리며 내일의 인재들까지 키우는 최한규 작가가 ‘나 하나쯤’이 아닌 ‘최한규야말로’ 경주를 그리는 작가로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그림을 보고 있으니 아픈 게 다 낫는 듯하네···!”
문득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보던 중년의 여자 환자 한 분이 딸인 듯 보이는 젊은이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 환자의 그림 앞에 최 작가의 최근작 ‘아름다운 날들’이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최 작가가 꾸준하게 시도해온 ‘숨’의 의미가 분명히 살아나고 있었다. 최한규 작가의 멋진 아이콘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빛나는 행복 가득한 전시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