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장식 장경호, 오심등잔, 기마인물상, 신라와당 등은 신라토기라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다. 경주시 하동 민속공예촌에서 도자기 공방 ‘보산토기’를 운영하며 신라토기 복원에 일생을 바쳐 온 배용석(82) 도예명장. 80여 평생 외곬로 도예 인생을 살고 있는 선생은 예정돼있던 부귀영화도 마다하고 도예에 천착해 지난한 세월의 궤적을 지닌 장인이다.
배 명장은 10대 성장기에 옹기공으로 가업을 이었고 옹기에서 화분을 거쳐 토기제작에 입문한다. 배 명장은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신라토기 성형에 매료돼 유물을 모델로 신라토기를 재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오늘날 토기 명장 배용석 선생을 있게 한 연유지만 고생길을 자처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고고학자 황수영 박사와의 인연은 다시없는 귀한 지침이 되었고 작업 성장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 ‘숨 쉬는 토기는 가마의 나뭇불이 좌우’한다는 확신아래 각고의 노력 끝에 신라토기의 재현에 성공한다. 천년의 손맛을 간직한 신라토기를 드디어 선생의 손끝에서 빚어낸 것이다. 1983년 하동 경주민속공예촌에 정착한 명장은 신라토기 재현과 양산에만 주력하고 온갖 난관을 딛고 몰두한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각 대학의 미술사 강의에서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 관심이 집중돼 있어, 신라토기의 오묘한 학술적 미술사적 가치는 빠트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2일, 하동 경주민속공예촌에서 신라토기의 명맥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하루도 쉬지 않고 변함없이 토기를 제작하고 있는 배용석 명장을 만났다. 여든을 넘긴 배 명장은 경험 많은 노장만이 풍기는 아우라를 지녔지만 평생의 작업에서 흘렸을 땀의 결실을 승화 시킨 듯한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관광상품으로 소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더 우선시 하는 선생은 돈보다는 문화가 먼저라고 강조한다. 선생을 통해 우리는, 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신라토기의 전승을 위해 고심해야하며 후진 양성을 위한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하는 시점으로 보였다.
-화분제작에 뛰어들어 ‘돈방석’에도 앉아보았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신라토기에 매료되면서부터 신라토기 재현에만 매진 선생이 태어난 곳은 건천읍 송선리 옹기마을로 평생 고향 경주를 떠나 본적이 없다고 한다. 옹기공장을 운영하던 선친을 일찍 여의고 가업을 이어받아 열일곱에 옹기공으로 출발한다. 스무살에 옹기보다는 수월하고 돈벌이가 좋다는 화분제작에 뛰어들어 ‘돈방석’에도 앉아보았지만 우연하게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에서 전시된 신라토기를 보면서부터 선생의 작업 방향은 일대 대전환을 맞게 된다. 토기 작업 이전 화분을 만들때는 코발트로 파란색을 내는 기술을 전수받아 그 기술을 화분에 접목시켜 대 히트를 쳤었다.
“당시 서울 남대문 시장, 부산, 광주, 진주, 마산 등 대도시에는 거의 제 화분이 들어갔어요. 제 화분 한 트럭 살려면 일 년 전에 미리 40만원씩 선납해야 할 정도의 인기였어요. 당시 논 한 마지기가 약 30만원 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 영화를 다 마다하고 토기제작에만 빠졌으니 가족의 불만은 당연지사였다.
-당시 고고학계 원로였던 경주박물관장 황수영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으로 토기 작업 계속 이어가 “제 눈에는 쇠(철)처럼 보이는 신라토기를 보게 되었어요. 쇠가 아니라 흙으로 구웠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일요일마다 박물관을 찾아 토기에 매료돼 종일 바라보곤 했어요”
토기가 너무 신기해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때, 당시 고고학계의 원로였던 경주박물관장 황수영 박사를 만나게 된다. 신라토기에 매료된 한 젊은이를 눈여겨보게 된 당시 황수영 관장은 오늘의 선생을 있게 한 ‘은인’이었다고 한다. 옹기 작업을 하면서 토기를 만들어 보았는데 이를 본 황 관장은 반색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당시 토기제작을 하는 이도 없었고 토기를 기억조차 하는 이가 드물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도자기와 옹기 작업을 하는 이는 많았으나 토기를 만지는 이는 없었던 터였다.
“제작기법에 대한 자료도, 교재도, 어떤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박물관에 무작정 가서 만들어 보곤 했다는 말에 황 관장은 박물관에 있는 토기 관련 서적과 토기를 찍은 사진을 제게 다 주셨지요. 또 저만 토기를 만져보고 관찰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지요. 관장님의 특별한 배려였지요. 전격적인 지원을 받은 이후부터는 신이 나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잘 되질 않았습니다. 옹기 굽는 가마에다 토기를 구웠으니 제대로 된 토기가 나올 리 없었죠. 또 옹기나 화분 제작용 흙으로는 색 자체가 토기의 그것과는 달랐고요. 불을 1200~1300도로 올려 숯이 쌓일 때 숯의 열로서 색깔을 내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러니 가마를 이리저리 수없이 박았습니다(지었다). 수 십 번 가마를 짓고 불을 때고, 다시 가마 허물기를 반복한 것이지요. 불을 땔 때의 경사도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4~5년간 이러한 과정이 지속됐어요”
-신라토기에 적합한 태토는 영천 봉정 흙, 내남면 노곡리 흙, 안강 노당리 흙// 토기 색 구현에는 소나무 땔감이 최고 대중적인 인기를 입어 잘 팔리는 토기 작업도 아니고 재현한다고 인정해주는 것도 아닌데 이런 수고를 반복했기 때문에 장남이었던 선생은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헛된 짓 많았지요. 하하. 장남으로서 역할에는 결격 사유가 많았지요”
이후에도 30대 중반까지 10년 가까이 이 과정은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강원도 기와 굽는 공장에서 기와 굽는 검은색을 내는 방법을 보고서는 토기의 검은색을 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내 시도를 해본 명장은 토기의 검은색을 얻는데 성공한다.
선생은 ‘토기는 산소와 탄소 덩어리’라며 나무를 땔 때 발생하는 산소와 탄소가 토기에 배이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40대가 넘어서야 토기의 원리를 제대로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간의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온 전국을 헤집고 다니곤 했지요”
신라토기에 적합한 태토를 얻기 위해 영천 봉정의 흙, 내남면 노곡리 흙, 안강 노당리 흙 등 이 세 곳의 흙을 30% 씩 고루 배합해서 작업했다.
“내남 흙에서는 검은색을 내는 원료를 찾았고 안강 흙에서는 얇게 만들 수 있는 접착력을 보완하고 영천 봉정 흙은 힘이 좋아 1300도 온도를 버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는 토기의 흙을 발견해낸 것이다. “불을 땔 때 쓰이는 나무의 종류에서도 토기 색이 좌우되는데 토기에는 주로 소나무가 제일입니다. 왜냐면 재가 남아있지 않아서 1300도의 고온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선생은 산소량이 많은 소나무 예찬을 이어갔다. 소나무는 1300도로 불 온도를 올리고 싶으면 계속 넣어주면 온도가 올라가지만 참나무는 나무를 계속 넣었을 때 숯이 쌓여 열이 잘 오르지 않는다는 것. 이 과정을 터득하기까지는 수없이 반복되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흙이 녹았다’고 표현되는 1300도 고온을 견딘 신라토기, 토기 배우러 왔다가는 거의 중도에 포기 수강생이나 제자들이 토기를 배우러 왔다가는 거의 중도에 포기를 하고 다른 도자 작업으로 전환해버린다고 한다.
“토기를 굽기 위해선 일주일 정도 불을 지피고 이후엔 불때기를 멈추고 열을 가둬놓다가 다시 일주일 이상 식혀 가마를 열어 공기를 빼고 식혀서 요출을 합니다. 백토에는 원하는 색이 그대로 구현되지만 토기 흙에선 절대 그렇지 않아요. 백자나 도자기 작업의 경우 유약이나 흙도 대량 생산으로 간편하게 구할 수 있고 전기가마로 약 10시간 정도면 완성되는 작업이니 그쪽으로 몰리는 것이겠지요. 잘 팔리고 작업하기 쉬우니 당연한 선택이겠지요. 사실, 토기 작업은 굽는 과정만하더라도 제가 평생을 해도 실패율이 높으니까요. 성공률이 60%를 넘지 못하거든요”
아직도 가마 작업을 손수 하고 있다는 선생은 “예전엔 일 년에 대여섯 가마를 땠어요. 많이 작업 할때는 일 년에 10회 정도도 했고요. 1980년대 올림픽 전후로 토기가 고가로 엄청나게 팔렸어요. 주로 일본 사람들이 사갔어요. 일본서 전시도 많이 했고요. 요즘엔 힘이 부쳐 그저 일 년에 한 번 정도 불 땝니다. 명맥만 간신히 잇고 있는 셈이지요”
-“가마에 불을 때면 한 발 이상 불꽃이 치솟아요” // “일생을 바친 이 작업이 대를 이어 전승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작업장 뒤 통가마 주변엔 소나무 땔감이 차곡차곡 에워싸고 있었는데 한 번 땔 때 이 분량( 3~4톤 정도)이 모두 소요된다고 했다.
“1300도 가까이 불을 때면 굴뚝의 연기 색깔을 잘 관찰하다가 불을 가둬야 합니다. 마지막에 흰 색 실오라기처럼 백색의 불이 피어오릅니다. 1200도 정도로 오르면 불 색이 하얘지거든요. 이때 불 때기를 중지해야 합니다. 유약은 전혀 바르지 않고 태토와 불의 온도, 불 때는 나무의 종류에 따라 토기의 색을 재현해 내지요. 이 시기를 아주 예민하게 주시해야 하고 불기술자 몇이서 함께 작업하는데 저는 전체 과정을 지시하고 참여합니다”
노장의 작업은 지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집중력 또한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가락 하나라도 아프면 물레를 돌릴 수 없어요. 흙을 만지다보니 면역력이 높아지는 것 같아요. 아직 안경 없이 신문을 봅니다” 건강은 좋은 편이라는 선생은 장인으로서 천직적인 요소를 갖췄다.
“일생을 바친 이 작업이 대를 이어 전승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여러 제자들을 가르쳐봤지만 다 포기합디다. 다른 길로 가버리니 실망이 커요. 제 여생 동안 이 작업은 이어질 것이지만 앞으로 이제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큰 욕심은 없어요. 단지 5년 전 경북도무형문화재에 신청했다가 낙방한 이후론 지금까지 재도전 하질 않고 있어서 주위에서 재도전해라는 권유는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