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마을은 보문사라는 사찰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보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 사찰이 보문리에 있었다고 해서 보문리사지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이 마을은 여강 이씨들의 집성촌인 이촌(李村)과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인 남촌(南村)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고, 마을 안에는 진평왕릉을 비롯하여 설총묘, 국보 제90호 금귀걸이가 출토된 보문동 합장분, 보문리사지, 명활산성의 일부 등의 문화재가 있다. 먼저 진평왕릉을 찾아 집을 나섰다. 시내에서 경감로를 따라가다가 분황사 뒤 구황교네거리를 지난다. 좌우로 알천체육공원과 신라왕경숲을 통과하여 숲머리마을 입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문마을길로 접어든다. 여기서 남동방향으로 약 1km를 더 나아가면 진평왕릉에 이른다. 왕릉 입구에 주차장이 있다. 왕릉 앞으로 넓게 펼쳐진 논에 모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볍씨가 발아해서 여물기까지는 대략 180일이 걸린다. 벼가 자라는 동안 농부는 자식을 돌보듯 정성을 기울인다. 벼알이 촘촘히 달린 모습을 본떠 만든 한자 ‘미(米)’자는 ‘볍씨를 뿌려 거둘 때까지 농부의 여든여덟(八十八)번 손을 거쳐야 쌀 한 톨이 생산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옛날 그때의 농사가 아니다. 여덟 번 정도의 손을 거칠까? 얼마 전 끝난 모내기도 이양기로 후딱 해치웠다. 과거 모내기 철이 되면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수십 명이 허리를 굽혀 모내기를 하였다. 못줄을 넘기며 “어이!”하면 모두 허리를 펴고 한숨을 돌리다가 다시 못줄을 대면 부지런히 모를 심었다. 그때 모내기를 하면서 어른들이 부르던 농요(農謠)가 귀에 쟁쟁하다.“물고야 청청 헐어놓고주인 양반은 어디로 갔나.문어 전복 에여들고첩에야 집에 놀라갔제.모시야 적삼 반적삼에분통겉은 저 젖 보소많이보면 병될게고손톱만치 보고 가소” 노래 가사 일부가 당시 어린 내가 듣기에는 민망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 가락이 다소 처연하게 들리었다. 비라도 올 때면 한결 구성지게 들렸었다. 보문 마을에 접어들면 오른쪽 숲속에 커다란 봉분이 보인다. 진평왕릉이다. 이 왕릉이 진평왕릉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사기』에 “한지(漢只)에 장사 지냈다”라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면 ‘한지’가 어떻게 이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삼국유사』 「기이」편 ‘신라시조혁거세’조에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 촌장은 기타(祗沱)이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또는 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명활산 아래 즉 오늘의 보문리 일대가 한기부라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 「열전」 ‘효녀지은’조에 “효녀 지은은 한기부(漢岐部)의 백성인 연권의 딸이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가 『삼국유사』 「효선」조 ‘빈녀양모’조에도 나오는데 그녀의 집이 분황사 동쪽 마을이라고 하면 지금의 보문마을이다. 그리고 『동경잡기』에 의하면 “한지수(閑地藪)가 부의 동쪽 8리에 있으니 곧 ‘한지원(閑地原)’이다. 예전에 숲이었다가 중간에 없어졌다” 이 내용에서 부의 동쪽 8리라면 지금의 보문이다. 따라서 한지(漢只), 한기(漢岐), 한기(韓歧), 한기(漢歧), 한지(閑地) 등 한자 표기에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현재의 보문지역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필자는 현 보문마을 입구에 있는 능의 피장자가 진평왕임이 거의 확실할 것으로 본다. 인디언 부족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다. 그리고, 네가 죽었을 때 세상은 울었지만 너는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왕은 살아생전 상제로부터 천사옥대를 받기도 했으나 아들이 없어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무덤 속에서 진평왕은 울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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