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는 이탈리아의 성악에서 시작하여 독일의 기악으로 끝난다고들 말한다. 150년(1600-1750)이 흐르는 동안 기악의 약진으로 성악과 기악의 비중이 비슷해지고, 음악의 무게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이동한 것을 빗댄 말이다. 이후 바로크 시대가 막을 내리자 진짜로 독일기악이 초강세를 보인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맹활약한 고전파 시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악이 성악을 앞지른 시대다. 이렇게 바로크에서 고전파까지의 음악사 흐름을 보면, 오늘날 이탈리아가 성악 강국, 독일이 기악 강국이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바로크 시대에 이탈리아와 독일의 가운데에 위치한 프랑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교회권력이 약화되고, 세속권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가장 강한 왕권이 출현했다. 이른 바 절대왕정이다. 특히 루이14세(Louis XIV/1638-1715)는 ‘짐이 국가다!’라고 말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예술을 장려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루이14세는 당시 왕실의 사랑을 받았던 발레를 진흥시켰다. 물론 그는 발레마저도 자신의 절대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했지만, 후에 파리왕립무용학교를 설립(1661)한 것을 보면 발레를 사랑했음에 분명하다. 이쯤에서 륄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륄리(Jean Baptiste Lully/1632-1687)는 이탈리아 출신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이다. 그는 무용뿐 아니라 작곡에도 능해 루이14세가 원하는 음악도 곧잘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처세술에도 능해 왕의 환심을 샀고, 파리의 공연 독점권을 손에 넣게 된다. 이렇듯 륄리는 루이14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프랑스 예술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당시 바로크 시대에 자신의 모국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활황하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이런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서정비극(Tragédie en musique)이라고 불리는 고유의 장르가 존재하고 있었고, 륄리는 여기에 왕이 좋아하고 자신의 장기이기도 한 발레를 삽입하여 발전시켰다. 서정비극은 바로 프랑스식 오페라인 것이고, 륄리는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가 되었다.
프랑스의 바로크 시대에 륄리와 함께 기억해야 할 인물은 바로 라모(Jean Philippe Rameau/1683-1764)다. 라모는 근대 화성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1722년 발간한 ‘화성론’(Traize de l`harmonie)에서 화성이 음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화성론은 륄리가 고안한 서정비극을 더욱 발전시켰고, 이후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후기의 작곡가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국립 가르니에 극장의 천정화에는 14명의 작곡가 이름과 그의 작품이 그려져 있다. 라모도 여기에 당당히 끼어있다. 그의 빛나는 업적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