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하는데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관조라 여겨진다. 지난 6월 28일 함원신 씨 페이스북에 오래전 보수하기 전의 석굴암 사진과 근래 석굴암의 모습을 동반한 포스팅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이 포스팅에는 함원신 씨의 소감과 함께 함원신 씨의 스승이셨던 황금찬 시인의 가르침 추억하는 장면이 실렸다. 황금찬 시인은 ‘경주를 지나며’라는 시로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포스팅은 황금찬 시인의 학창시절로 돌아간다. 황금찬 시인은 당신이 일제강점기 고고학자인 스승을 따라 석굴암을 마주한 감회를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고 한다. “붕괴직전의 석굴암을 복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제일가는 고고학자가 제자들과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 본전불 앞에 선 고고학자가 오랜 시간 미동도 없이 본전불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윽고 돌아선 그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제자들이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고 물었다. 한참을 말없이 제자들을 보시던 그가 이리 되물었다 “너희들 눈에는 이게 보이지 않느냐?”“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황금찬 선생이 제자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혹시라도 석굴암에 가게 되면 그분이 본 게 무언지 보도록 노력해 보거라” 황금찬 선생님의 이 말씀 한마디 가슴에 깊이 박힌 함원신 씨는 평생을 보이지 않는 뭔가를 보려고 노력해왔다며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우의 대사를 소개했다. `중요한 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어’ 과연 함원신 씨가 석굴암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이 글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황금찬 시인은 무엇을 보았고 이 일화의 원작자격인 일인 고고학자 역시 석굴암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역시 알 수 없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보살상과 제자상, 천왕상과 인왕상, 신중들이 둘러 서 있고 정밀하게 조성된 감실의 구조도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아야 할 대상이다. 지난 주 남양주시 봉선사에서 석굴함 재질과 같은 경주 남산의 화강암을 쪼아 ‘해피붓다 해피타이거’ 전시회를 진행 중인 경주출신 조각가 오채현 선생은 경주 화강암이 성질이 대리석에 비해 훨씬 까다롭다며 조각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심지어 신라의 조각장인들은 돌 속에 부처님이 원래 계셔서 거추장스런 돌을 걷어내고 부처님을 드러내는 심정이었을 것이라 표현하며 자신도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음으로 보는 이들의 경지는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함원신 씨의 마음과 스승이신 황금찬 시인의 마음, 그 일인 고고학자의 석굴암에 대한 마음은 우리에게 석굴암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또 다른 숙제를 제시한다. 비단 석굴암뿐일까? 우리 주변의 유물과 유적, 심지어 우리 시대의 예술에도 똑 같이 적용해야할 의미 깊은 숙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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