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오늘도 건설현장에서 노동자 1명이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오후 7시 30분 공연, 마치 뉴스의 앵커 브리핑을 보는 듯 이날 오후에 있었던 모건설사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사고가 마지막 대사로 인용되어 객석에 울려 퍼진다. 만약 이날 사망 사고가 생기지 않았다면 대사는 27일에 일어났던 모 조선소 공사현장 화장질 질식사고가 되었을까? 연극의 내용을 떠나 무대공연에서 무대외적인 세상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발상이 놀랍다. 연극이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이 마지막 대사에서 확고히 선명해진다.
경주 출신 강훈구<인물사진> 감독이 지난달 22일부터 30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공연한 마더퍼커 오이디푸스(Oedipus, The Motherfucker)는 ‘끝나지 않을 노동계의 숙제’를 던져 준 작품이었다. -노무현은 새로운 시대의 맏이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구시대의 막내였을 뿐…!! 얼핏 이 연극은 노무현을 추억하고 재조명하려는 연극처럼 보인다. 비록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둘러 가장하기는 했지만 노무현의 정치역정을 일일이 되짚어 가는 대사에서 주인공이 누가 봐도 노무현임을 알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이 사실을 안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오이디푸스는 생을 마칠 때까지 테베를 통치했다. 호메로스(BC800~BC750)의 이 비극적인 서사시에 영감을 받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BC497/6~BC406/5)는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제목으로 걸작 연극을 만들어 이후 전세기에 걸친 후대에게 오이디푸스 연극의 바이블로 남겼다. 소포클레스는 극적인 긴장을 더하기 위해 이오카스테의 주검을 본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찔러 아무도 사실을 모르는 암흑세계를 만들고 테베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연출한다.
강훈구 감독은 이 비극적인 왕을 연극에 녹였다. 역병이 창궐한 테베에서 왕이 된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다름 아닌 노무현이고 역병은 라이오스로 대변되는 독재와 기득권의 온갖 횡포와 기만, 특히 이 극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으로 상징된다.
역병이 시작된 테베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로 세계가 공황상태에 빠진 2021년과 절묘하게 엮인다. 마침 시국은 조국 전 장관을 가운데 두고 양극화되는 혼돈을 맞았다. 강훈구 감독은 이 공황과 갈등의 시간을 무대에 ‘살벌하게’ 펼쳐 놓았다.
얼핏 이 연극은 노무현을 미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노무현을 왕,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국민들이 노무현에게 자신들의 배당과 권리만 주장했을 뿐 철저히 이용하고 버린 것을 비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더 한편에서는 역병으로 대별되는 노무현을 단 한 번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느긋하게 눌러앉거나 혹은 ‘필라테스를 즐기면서’ 틈만 나면 노무현을 깔아뭉개려 한 기득권 정치세력의 폭력을 고발하는 듯도 보인다.
그러나 이 연극은 오히려 그 반대다. 노무현은 신탁을 거부하려 무던히 애쓰지만 결국 운명에 굴복해 죽음을 선택한 패배자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인권노동변호사 시절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노동자들을 정작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더 많이 죽음으로 내몬 정치인이다. 김선일의 목숨을 극렬 무슬림 테러분자들에게서 지키지 못했고 기득권재벌의 이익을 위해 한미 FTA에 서명했다.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를 전면에 내세운 자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아 부린 몽니다. ‘느긋하게’ 그를 저격하려던 자들은 ‘얼씨구’하며 그 몽니에 맞불을 놓았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지지자들이 부랴부랴 탄핵에서 노무현을 구해냈지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신들을 대신해서 싸울 하수인이 필요했을 뿐, 다시 정권을 쥔 노무현이 자신들의 하수인이 되지 못하자 또 다시 가차 없이 버렸고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훈구 감독은 연극 중간중간에 노무현을 추종하는 자들과 이른바 민주화 세대라는 386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특히 ‘책으로만 정치를 배운 자들이 무엇을 제대로 하겠는가?’는 대사는 뼈를 찌른다. 심지어 데모만 한 그들이 올바른 정치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성토하는 듯하다.
“정치인 노무현이 새로운 시대의 맏이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구시대의 막내였을 뿐이었다는 운명을 직면하는 과정을 냉철하게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강 감독의 의도가 지나칠 만큼 잘 드러났다.
이 연극은 겉으로는 노무현과 오이디푸스를 세워 놓았지만 실상은 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된 노동극이다. 박정희 시대 전태일의 분신을 시작으로 노무현 시대 노동자들의 분신과 자살, 바로 지금현재 이 시간까지 안전장치의 미흡으로 연일 죽어나가는 근로자들을 적나라하게 나열하며 정권이 바뀌고 지도자가 달라져도 결국 근로현장은 정치가들의 관심권 밖임을 절절한 목소리로 규탄한다. 대사를 빌린, 죽은 근로자들과 가족들의 분노와 슬픔, 원망이 관객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유감스럽게도 연극은 정말 재미없다.
“정치란 게 원래 재미없잖아요!”
연극 시작할 때 어릿광대의 설레발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재미가 없다는 이유는 도대체 쉴 틈이 없어서다. 강약중, 약중강··· 리듬이 있어야 하는데 이 극에는 이런 리듬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절규와 구호와 고함, 핏대가 빗발친다. 그래서 온갖 좋은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강 감독이 파악한 근로현장이겠기에 그토록 쉴 사이 없이 밀어붙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극을 다 본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진다. 기성세대로서 죄스러운 마음까지 들 지경이다. 그래서 더 재미없다.
-외국인 배우 과감히 기용, 휴대폰과 무대 대형 스크린 연결 등 신선한 강훈구식 기획력 돋보여 이 연극은 강 감독의 획기적인 무대연출이 돋보이는 멋진 작품이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외국인 배우의 과감한 기용이다. 이 연극이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깔아놓았음인지 외국 배우들의 등장이 이색적이면서도 매우 신선하게 보인다. 심지어 이 외국배우들의 한국어 구사가 너무 출중해서 놀랍고 외국어 대사인데도 연기력이 빼어나 더 놀랍다.
휴대폰과 무대의 대형스크린을 연동해 배우가 배우를 찍어 올리는가 하면 무대에서 본 객석까지 하나의 무대로 뒤섞은 효과도 새롭다. 연극 중간에 ‘정치가는 초상권이 없어요’라며 관객들에게 내놓고 포토타임을 준 것은 강훈구 감독의 배짱을 보든 듯해 기발했다.
분명한 주인공이 있지만 배우들이 적절한 포지션에서 무대를 장악한 채 자신들의 역할을 맹렬히 드러내도록 안배한 것 역시 다른 연극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위에서 지적했듯 시종일관 분노와 광기, 절규로 치달은 와중에 배우들의 열연이 무진장 빛났다.
강 감독은 지난해 백상예술대상에 ‘진짜진짜마지막황군’으로 ‘젊은 연극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죽은 사회의 시인’(2015)을 시작으로 매년 작품을 내왔고 ‘미인도 위작논란 이후 제2 학예실에서 벌어진 일(2017)은 한국문화예술위원히 창작산실 연극부문 올해의 신작 공연지원작에 선정된 작품이고 마지막 황군-남산은 남산예술센터 서치라이트 프로그램에 선정된 작품이다. 이번 작품 역시 ‘2020 서울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강 감독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을 버리고 연극을 택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 때 심취한 연극동아리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며 연극을 향한 꿈을 키운 강훈구 감독은 그와 함께하는 야심찬 극단 ‘공놀이클럽’을 통해 앞으로도 무수한 화제작을 만들 것이다. 32세, 대단한 기획력과 지배력을 지닌 전도양양한 젊은 연출가인 만큼 앞으로 그가 어떤 도전을 지속할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만 한 가지 강 감독의 다음 작품은 지금보다는 훨씬 안전한 근로현장에서 딱 강 감독 정도의 젊은이들이 밝게 웃는 작품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런 근로현장을 꿈꾸는 것이 이 작품을 만든 강 감독의 궁극적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