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삼국유사에는 본피부 출신으로 나옴) 출신으로 857년(헌안왕 원년)에 태어나 868년 12세 되던 해에 아버지 견일(肩逸)의 후견으로 신라땅에서 신분상의 제약인 6두품을 극복하고 입신양명을 위해 당으로 조기유학을 떠나 당의 장안에 있는 국자감에 입학하여 8년 코스를 7년만에 조기수학하고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참고로 그의 뒤를 이어 역시 신라 출신 김가기, 최승우도 마찬가지로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876년(헌강왕 2년) 20세에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懸尉)를 제수 받아 당나라에서 첫 벼슬길에 나갔고, 23세 되던 879년 황소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이 때에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乘務朗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랐다.
885년(헌강왕 11년) 29세 때 신라로 귀국해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제수되었으나 진골귀족들의 비토와 견제로 외직을 원하여 대산군(전북 태인),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 등의 태수를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년) 2월 그의 나이 38세에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 국정의 난맥상을 시정하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時務十條)를 건의하여 채택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 실행이 요원하자, 각지를 유랑하다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저술로는 중국의 학자들이 24정사 외에 필독으로 참조하는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고 그 외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등이 오늘날에 전해온다. 고운이 남긴 글씨는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등에 새겨져 있다. 그의 문장은 아주 빼어나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 였으며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계원필경(桂苑筆耕)>은 그 제목 자체가 최치원 자신의 인생부침이 고스란히 은유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단순히 뜻을 새기면 ‘계원(桂苑) 은 계수나무 동산이요, 필경(筆耕)은 붓 농사 를 짓다’ 의 뜻이 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계원(桂苑)은 고려조에서 조선조까지 과거급제 의미의 상등어(相等語) 이다. 즉 젊은 날 중원의 빈공과에 장원급제하고 청운의 푸른 꿈을 꾸며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대륙을 누비며 화려했던 자신의 청장년기를 대변한다. ‘필경(筆耕)’에는 그의 인생 후반부인 신라로 귀국해 관직을 제수받고 탁월한 붓농사(文士)로 인생 2막을 열겠다는 그의 충정이 녹아 있다. 더 깊이 통철(通徹)해 들어가면 전화에 휩싸인 대륙이나 무너져 가는 신라를 보면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쳐 볼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영혼은 죽어서라도 달나라의 계수나무 동산(桂苑)에서 항아의 방아찧기나 귀여운 옥토끼를 보면서 유유자적을 즐기며, 후세에 길이 남을 전대미문의 붓경작(筆耕)을 남겨 놓겠노라는 의중이 아닌가 하고 필자는 어림짐작해본다.
고운 최치원은 유불선에 능통했고, 학문의 세계는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천부경>의 묘리를 81한자 한문으로 묘향산 석벽에 새겨 후세에 전했으니, 고려 현종 때 문묘 18인중 신라를 대표하여 홍유후(弘儒侯) 설총과 더불어 문창후(文昌侯)에 또한 국불천위(國不遷位)에 추시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최근 영국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를 보면 서방세계의 중국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함이 여실하다. 그들의 불편한 심기와 상관없이 중국에 대한 우리의 외교는 서방 어느 나라보다 더 장구(長久)하고 깊었다. 2015년 10월 한·중 회담 당시 시진핑 주석이 극찬한 고운의 시 범해(泛海)를 음미해 보는 것은 이런 시기에 의미가 있어 보인다. 양국 사이의 오랜 신뢰에 대해 서방세계의 이해가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범해(泛海)>掛席浮滄海(괘석부창해) 돛달아 걸고 푸른바다 배 띄우니長風萬里通(장풍만리통) 기나길 사 바람은 만리에 통하네乘槎思漢使(승사사한사)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採藥憶秦童(채약억진동) 불사약 캐던 진의 아이 그립누나​日月無何外(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어찌 허공밖에 있으며乾坤太極中(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극 가운데 있는가 蓬萊看咫尺(봉래간지척) 봉래산이 여덟자발치에 보이거늘吾且訪仙翁(오차방선옹) 내 또한 신선 어르신을 배알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