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분황사 뒤편 구황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좌회전을 한 후 보문단지로 가는 북천북로를 따라 약 1km를 가면 좌측으로 우거진 숲이 보인다. 이 숲속에 헌덕왕릉이 있다. 길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주차장이다. 여기서 숲속으로 200m쯤 들어가면 헌덕왕릉에 이르게 된다.
신라 제41대 왕인 헌덕왕의 이름은 언승이다. 조카인 제40대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제38대 원성왕의 큰아들인 혜충태자 인겸이다.
헌덕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정치권력을 독점했으므로 귀족들의 반발을 낳아 김헌창의 반란을 야기했다. 원성왕 7년(791)에 제공의 난을 진압하고 원성왕 말년에는 정치적인 기반을 확고하게 갖추었다.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이어 상대등에 올라 애장왕 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809년에 조카 제륭, 아우 수종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조선시대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헌덕왕 대에는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 개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애장왕 당시의 개혁 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왕권 강화에 도전하는 세력의 반발 또한 거세었다. 비록 난을 일으켜 왕위를 쟁취했지만, 헌덕왕은 여전히 반대 세력의 반발에 부딪쳤다. 그 결과 정국은 날로 불안해져 갔으며 빈번한 기근은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헌덕왕 6년(814)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났고, 이듬해에는 서쪽 변방의 주 · 군에 기근이 들었다. 이후 수년 동안 계속해 기근이 들었으며, 초적(草賊)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816년에는 병력 3만을 보내 당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을 도왔다. 822년에는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헌창의 아들 범문도 반란을 일으켰다. 난을 모두 진압한 이듬해인 826년 생을 마감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천림사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는 능이 천림촌의 북쪽이라고 하였다. 천림사가 천림촌에 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여 두 사서에 기록된 장지는 같은 지역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 헌덕왕릉의 남동쪽 300여m 떨어진 북천 둔치에 폐탑재와 초석 등의 석재가 있었다. 1990년대 이전 필자도 이 석재 등을 본 기억이 있다. 이 석재들은 1991년의 태풍 글래디스 때 일부가 유실되었으며, 남은 석조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겼다. 이 석조물이 천림사의 유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성덕왕 14년에 “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의 못[池] 위에서 비를 빌게 하자 열흘 동안 비가 내렸다”는 기록에 나오는 임천사가 천림사와 같은 사찰일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사적 제29호로 지정된 헌덕왕릉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이고 매장주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난간석의 위 아래로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이 구멍에 관석(貫石)이 끼워져 있다. 난간석과 호석 사이에 바닥돌을 깔았다. 병풍처럼 돌린 호석의 면석과 면석 사이에는 탱석을 끼워 이를 고정시키고, 그 위로 갑석을 올렸다.
이곳 헌덕왕릉에서는 면석과 탱석의 수가 72개이던 원성왕릉과 전(傳) 경덕왕릉보다 24매를 추가하여 총 96매로 늘렸다. 탱석에는 같은 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12지 중 돼지[亥]·쥐[子]·소[丑]·호랑이[寅]·토끼[卯]등 5개 상만 남아 있고 북천을 면한 쪽 신상은 모두 없어졌다. 능의 동남방으로 흐르는 북천이 1742년(조선 영조 18) 8월 22일에 범람해서 일부가 유실된 것이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이 영조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고 경상도관찰사가 수축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에 있는 석사자와 석인상이 이곳 헌덕왕릉에는 없는데 이는 현재 분황사 모전석탑 서편의 석사자상과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는 석인상이 이곳 헌덕왕릉에 있던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남·서쪽 호석과 난간석의 대부분은 1970년대 경주고도 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정비·보수함으로써 새롭게 마련된 것이다. 왕릉의 남동쪽에 놓인 상석은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방한 탁자식 형태로 2007년에 설치한 것이다.
왕릉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헌덕왕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김유신으로 잘못 기록한 문헌도 남아 있으며 최근에는 진평왕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최근 외신보도에 의하면 인공지능(AI) 신경망을 활용하여 BC. 6세기부터 3세기까지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서 활동했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의 무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우리 고고학계에도 이를 참고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