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농경사회에서 소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온순해서 사람을 잘 따랐고 장정 예닐곱 명을 훌쩍 감당할 만큼 힘이 세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무거운 쟁기로 밭을 가는데 소보다 편한 일꾼이 없었다. 들판의 풀만 뜯어 먹여도 잘 자랐고 재산가치고 높아 소 팔아 대학 보내는 게 가능하던 시절도 있어 대학을 상아탑 아닌 우골탑이라 부르기도 했다. 특히 암소는 송아지를 낳아 기르는 만큼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송아지 낳은 암소에게는 으래 흰콩으로 죽을 쑤어 몸보신 시켜 주던 것이 일상적인 농부의 심성이었다. 송아지는 어미 소 곁을 잠시도 떨어지지 않아서 소 풀 먹이러 가면 어미 소는 대충 말목을 박아 풀 많은 들판에 묶어두고 송아지는 풀어놓아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송아지의 맑은 눈망울과 그 송아지를 바라보는 어미 소의 선한 눈매만큼 순하고 평화로운 모습도 없었다. 송아지 코뚜레 하는 날이면 송아지의 울부짖는 소리가 한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애처롭게 찔렀고 어미 소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리기도 했다. 때문에 코뚜레 할 때쯤이면 미리 송아지를 장에 내다 파는 것이 상례였다. 자기가 키우던 송아지가 장으로 떠나는 것이 서러워 몰래 눈물 훔치던 소년은 대부분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갔다. 당연한듯 ‘송아지’ 노래에 익숙하던 아이들도 사라졌고 이제는 그런 노래가 있었는지조차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농촌이 현대화 돼 각종 농사용 기기들이 발전하면서 들판에서 소가 사라졌다. 임무가 줄어든 소는 고기소로 전락해 목장 우리 속으로 들어갔고 소가 사라질 즈음 들판은 꼬불꼬불하던 논둑길도 사라졌고 바둑판 같이 구획화 된 논과 밭에는 트랙트, 콤바인 같은 농기계들이 점령했다. 소가 사라진 논과 밭은 당연한 듯 고향이나 정겨움, 추억마저도 사라진 채 생산과 자본의 가치로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상락 씨 페이스북에 오랜만에 들판에서 함께 뛰노는 어미소와 송아지의 모습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소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된 것처럼 추억을 소환한다. 이상락 씨의 소가 어느 목장의 소인지는 모르나 어미 소의 젖을 찾아 머리를 들이미는 송아지의 모습이나 어미 소의 눈망울만큼은 시공을 떠나 평화롭고 편안하다. 이 귀한 순간을 포착한 이상락씨의 따듯한 마음도 덩달아 보여 그가 쓴 한 줄의 글이 마음으로 쏙 들어온다. “자연의 섭리, 순응하며 삶을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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