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는 바흐가 사망한 해인 1750년에 끝난다. 이는 바로크 시대에 기악이 약진했음을 암시한다. 바흐는 바로크 시대 기악발전의 아이콘으로 고전파 시대로 넘어가는 교량역할을 했다. 미술 분야는 중세와 르네상스와 바로크가 확연히 구분되지만, 음악은 그렇지 않다. 음악은 중세나 르네상스나 모두 성악이 대세였다. 교회 성가대를 상상하면 된다. 반면, 기악은 세속음악이라 하여 천대받았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좋은 악기가 많이 개발되고, 이들 악기를 위한 작곡이 성행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성악과 기악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몬테베르디(C.Monteverdi/1567-1643)가 오르페오(Orfeo/1607)를 초연하면서 근대 오페라의 서막을 알렸듯이, 기악발전도 이탈리아에서 태동했다. 선구자는 코렐리(A.Corelli/1653-1713)다. 코렐리는 트리오 소나타(trio sonata)와 합주협주곡(concerto grosso)을 창안했다. 이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적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이어서 비발디(A.Vivaldi/1678-1741)는 합주협주곡에서 독주협주곡으로 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 ‘사계’는 바이올린 (독주)협주곡이지만, (대규모)오케스트라가 아닌 (소규모)현악 앙상블과 함께한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기악발전의 흐름은 바로크 시대 후기에 이르자 독일로 방향을 선회한다. 바로크 후기를 대표하는 음악가는 텔레만, 헨델, 바흐이다. 텔레만(G.Telemann/1681-1767)은 다작(多作)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사람이다. 알려진 곡만 3천여 곡이라고 한다. 그는 오늘날 공공 연주회의 효시 격인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의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이런 활발한 활동 덕분에 당대에는 텔레만이 헨델이나 바흐보다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헨델(G.Händel/1685-1759)은 독일 태생이지만 영국에 귀화한 음악가다. 그는 글로벌 음악가로서 오페라, 오라토리오 분야에 걸작을 남겼다. 한편, 헨델과 동갑내기인 바흐(J.S.Bach/1685-1750)는 살아생전 독일에서만 활동했다. 오늘날 바흐는 3B(바흐-베토벤-브람스)의 첫 번째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그리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지 79년 만인 1829년, 20세의 청년 멘델스존이 바흐의 대작 ‘마태 수난곡’ 악보를 우연히 찾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면, 바흐는 그저 그런 음악가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온전한 평가를 받아 ‘음악의 아버지’가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기악에서도 다양한 형식이 시도되었다. 앞서 언급한 코렐리의 트리오 소나타와 합주협주곡 외에 모음곡(=조곡, 슈트, 파르티타), 변주곡, 푸가, 신포니아 등 여러 실험이 이루어졌다. 한편 연주자에게는 즉흥곡의 재량이 부여되었다. 이런 시도들이 당대에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바로크는 ‘못생긴 진주’란 뜻으로 불리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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