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박목월흰달빛자하문紫霞門달안개물소리대웅전大雄殿큰보살바람소리솔소리범영루泛影樓뜬그림자흐는히젖는데흰달빛자하문紫霞門바람소리물소리
목월의 은근하고 처연한 싯귀가 정겹다. 숨 가쁘게 휘둘리지 않고 가만히 읊으며 들어서는 불국사일주문이다. 유년의 기억 속 사월초파일 등불이 밝혀진다. 목선이 유난히 고와 흰 동정 깃 한복맵시가 우아해 보이던 어머니 모습 연꽃처럼 피어난다. 초파일날이면 분황사·보리사·불국사 세 곳의 절을 조여 오는 버선발로 순례하던 어머니다. 자식 위해 절을 하도 많이 올려서, 집에 도착한 저녁나절이면 통통 부운 발 탓에 버선이 벗겨지지 않았다. 그러면 치마폭 매달리던 4남 1녀 오남매는 꽉 조인 버선코를 살갑게 쥐고, 까르르 웃음보 퍼트리며 벗기곤 했다. 생각해보면 생(生)의 아름다운 첫 장면 첫 순간들이다. 손 매무새 정갈한 뽀얀 옥양목버선, 흰 코고무신, 단아한 어머니 초상(肖像)을 불국사 절 마당 버선코 닮은 소맷돌에서도 유추해 본다. 부처님 나라 불국토, 말없이도 가슴 열어두고 안기면 연꽃봉오리다.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의 숨결 빛나는 천년가람이 과거와 현재의 맥을 짚고 간다. 현생의 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의 근본으로 곧추세운 사찰의 공덕이 깊다. 선조님들의 깨우친 도리와 지혜와 슬기를 불교예술로 승화시킨 불국사다.【삼국유사】 효선 제9 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 ‘모량리의 가난한 경조(慶祖) 여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부자인 복안(福安)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였는데, 삯으로 얻은 밭을 생계로 삼았다. 어느 날 흥륜사 점개(漸開)스님이 육륜회(六輪會)를 열고자 복안의 집에 시주를 왔다.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자 스님이 축원을 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개를 얻게 될 것이며, 대대손손 복을 누리고 장수할 것입니다” 대성이 문간에서 스님의 축원을 듣고선 집의 어머니와 의논했다. 전생에 지은 복이 없어 삶이 곤궁하니.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생에는 부귀한 곳에 환생하길 원했다. 어머니도 아들의 뜻에 기쁘게 시주했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는데, 나라의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 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죽었는데, 열 달 후에 너의 집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놀라 모량리를 찾아가서 알아보았더니. 하늘의 소리가 들리던 날 대성이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부인이 임신하여 아기를 낳으니 왼손을 쥐고 펴지 않았다. 한 칠 만에 손을 폈는데, 쥐고 있던 금패에 ‘대성’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았다. 성장하면서 사냥을 즐기던 그는 토함산에서 곰을 잡아 산 아래 마을에서 묵었다. 꿈에 죽은 곰이 나타나 살생을 원망하며 덤벼들었다. 대성이 용서를 빌자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 달라 청했기에 약속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사나운 꿈자리에 놀란 몸부림으로 이부자리가 땀으로 흥건했다. 이후론 사냥을 하지 않고 곰을 잡은 자리에 장수사(長壽寺)절을 지었다. 기도의 공덕으로 마음의 자비를 구한 그는 부모님의 은혜가 무량하게 사무쳤다. 그리하여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워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승려를 각각 두 절에 주지(住持)로 청했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준 부모에 효도한 것이다. 한 몸으로 두 생의 부모에게 효도한 일은 옛날에도 전해지지 않은 지극한 효심이다. 보시를 게을리 하지 않은 공덕이 참으로 깊다. “경덕왕 대에 대상(大相)인 대성이 천보(天寶) 10년 신묘년(辛卯年751)에 처음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 대 대력(大曆) 9년 갑인년(甲寅年774) 12월 2일 대성의 사망으로 나라에서 공사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