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지는 동쪽은 산지로, 남쪽은 문천(남천), 서쪽으로는 서천, 북으로는 알천(북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 하천 중에서 북천이 경주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각종 문헌으로도 확인이 된다. 먼저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달라이사금 7년(160) 여름 4월 “폭우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쳐 인가가 표류했다.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유례이사금 7년(290) 여름 5월 “큰물이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흘해이사금 41년(350) 여름 4월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 평지에 3-4척이나 물이 차고, 관가와 민가가 떠내려가고, 산이 13개소나 무너졌다”
소지마립간 18년(496) 여름 5월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인가 200여 가가 표류했다”
이 기록에서 월성이 무너지고 관가와 민가가 떠내려갔다는 것 등도 모두 알천의 범람이 그 원인이었다.
이후의 기록을 살펴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 “봉덕사가 북천에 잠기자 천순4년(1460) 경진에 성덕대왕 신종을 영묘사로 옮겨 달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1605) “이번의 수재는 개벽 이래 없었던 것이다. 경주는 부내(府內)가 큰 바다로 변해버려 잠기지 않은 민가가 없었다”
『문헌비고』 영조 18년(1742) “9월 경주에 큰물이 나서 헌덕왕릉을 무너뜨리니 … ” 등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 1959년 사라호, 1991년 글래디스 등 태풍으로 인한 큰 피해도 모두 북천의 범람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북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동경잡기』 「산천」조 “알천 냇물이 동북으로 흘러나와 곧장 읍의 거주지로 뚫고 들어오므로 고려 현종 때 전라 · 충청 · 경상 3도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돌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듦으로 수해를 방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북천을 동천, 알천이라고도 하며 추령에서 나와 굴연으로 들어간다”
『동경통지』 “추령의 물이 암곡리계와 합하여 알천이 되니 알천이 북천이다. 혹 동천이라고도 하니 원류가 동으로부터 흐르기 때문이다” 등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재앙을 끼친 북천이지만 필자에게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여름이면 푹푹 찌는 더위를 식히려고 북천에 첨벙 뛰어들곤 했다. 홀랑 벗은 채 목욕을 즐기고는 물에서 나와서는 몸을 닦을 수건이 없어 뜨거운 자갈밭에 드러누워 몸을 말렸다. 무더운 밤에는 하천의 위쪽은 여자, 아래는 남자 목욕탕이었다.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였으나 어두운 밤이라 상대편이 보이지는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방천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세곤 했다.
가끔 북천 건너에 있는 과수원으로 가서, 들고 간 보릿짚과 풋사과를 바꿔 먹었다. 학교에서는 배탈이 난다고 풋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농약이 뿌옇게 묻은 풋사과를 옷에 쓱쓱 문질러 그냥 먹었다. 신기하게도 그 풋사과를 먹고 배탈이 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외가가 윗동천에 있고, 북천 북쪽 제방 너머 40-50여 평쯤 되는 우리 밭이 있어 북천을 자주 건너다녔다. 당시에는 교량이 없어 징검다리를 건너다녔는데 비가 많이 온 후에는 그 돌다리마저 떠내려가고 없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너다가 가끔은 센 물살에 신발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날씨가 추울 때는 뼛속까지 발이 시렸다.
제방 북쪽 경사면에는 ‘애장’이라고 하는 죽은 아이들의 묘지가 있었다. 당시 홍역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그래서 홍역을 치루고 난 후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도 호적에 나이가 한 살 적게 등재되어 있다. 아이가 죽은 후 동생이 태어나면 다시 출생신고가 번거로워 형의 호적을 동생이 그대로 이어받는 사례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드물지만 호적 상의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더 많은 친구도 있었다.
지금도 북천변을 지나게 되면 추억에 젖어들게 된다. 그런데 근래에 북천 주변도 너무 많이 변했다. 보문저수지 일대가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 있어 이곳이 그 옛날 북천변인가 하고 내 눈을 의심할 때가 있다.
이 북천을 거슬러 오르면서 윗동천의 헌덕왕릉, 보문의 진평왕릉, 설총묘, 보문리사지를 둘러보고, 천군의 명활산성, 천군리사지를 찾고, 덕동호에 수몰된 고선사지의 흔적을 더듬고, 암곡의 무장사지, 황룡의 황룡사지를 살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