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은 우리나라 유학, 특히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봉으로 사림(士林)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김종직 선생의 문하생인 외삼촌 손중돈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했다. 23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지만 28세에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은 후 관직을 사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인동현감, 밀양부사, 경상도 암행어사 등 외직으로 돌았다. 40세에 사간원 사간을 지내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좌천되어 경주로 낙향하면서 양동마을 자옥산 세심천 변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주자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이 비판받자 ‘비록 주자가 다시 일어나도 내 해석을 따를 것이다’는 말을 할 만큼 확고한 자신만의 해석체계를 확립했고 이는 퇴계 이황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회재 선생이 안빈낙도의 도를 실천했던 독락당은 영남 유학의 새로운 활로로 당대에는 영남일대 청운의 꿈을 품은 선비들의 경연장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자연과 어울린 힐링의 명소가 된 듯하다. 지난 5일 이재탁 씨가 독락당을 찾은 포스팅에서 쓴 글은 한 편의 시와 같다.
“얼마나 조용한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뿐입니다. 한참 마음을 모으고 나면 물소리 따로 새소리 따로 바람소리 따로 마음 먹은 대로 구분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을 풀고 나면 합창으로도 들을 수가 있지요”
500여년 전 독락당 지은 회재 선생도 어쩌면 이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가 좋아 세심천에 공부방을 지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독락당을 흐르는 계곡의 이름이 세심(洗心), 마음을 깨끗이 닦는 시내다. 회재선생의 관조적 삶이 세월을 격해 독락당 세심천을 따라 이재탁 씨의 가슴으로 흐르는 듯하다. 자연의 소리들을 따로 떼서 들었나 하면 합창으로도 감상할 수 들었다는 이재탁씨의 말 속에서 기(氣)와 리(理)의 조화를 일깨우는 회재 선생의 경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