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출신의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1730~1783)은 1773년 10월 4일 고령군 성산면 무계진에서 경주를 향해 출발했다. 하양을 거쳐 영천 고경방면에서 시령(柴嶺:시티재)를 넘어 안강 하곡과 옥산을 지나 경주시내로 들어갔으며, 10월 8일부터 10월 14일 7일 간 경주읍성·종각·봉황대·숭덕전·오릉·나정·월성·첨성대·계림·분황사·백률사·굴석사·호림 등을 두루 둘러보고 다시 안강 옥산서원에 들렀다가 10월 20일 고령으로 되돌아갔다. 지촌선생은 고령 우곡면 도진리(桃津里) 집에서 태어났고, 7, 8세 무렵에 장로들이 큰 그릇됨을 인정하였고, 장성해서는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이 고을에 머물며 제자를 모을 때 공은 아직 관례를 하기 전이었지만, 가서 따랐고 배운 바가 많았다. 하지만 30세에 과거공부를 폐하였고, 이후 대산 이상정을 따라 노닐며 학문을 배웠고, 향우 정광(靜觀) 곽기(郭基)와 두와(蠧窩) 최흥벽(崔興璧) 등이 선비의 덕망을 말하였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1837~1902)의 행장에 의하면, “공의 8대조 죽연(竹淵) 박윤(朴潤)은 남명 조식·낙천(洛川) 배신(裵紳, 1520~1573)과 더불어 도의지교를 맺었고, 도원(桃源) 박원갑(朴元甲, 1564~1618)은 임진왜란에 망우당 곽재우·송암(松庵) 김면(金沔, 1541~1593)과 창의하여 업적을 인정받아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증조부 박문징(朴文徵)과 조부 박태로(朴泰老) 모두 벼슬을 멀리하였고, 부친 박돈(朴惇)은 효행이 뛰어났으며, 모친은 치성송씨 송학기의 따님이다”설명한다. 「遊東京錄」의 특징은 다른 일기체 형식의 유기에 비해 내용이 매우 간략하지만, 일정별 서술로 감흥은 되도록 배제하고 유람한 지역의 정보와 경유지에 대한 자세한 서술을 주로 하였다. 게다가 경주로 오가는 길에 영천의 사촌누이 집을 재차 방문하고, 시조묘와 옥산서원[晦齋 李彦迪]․구강서원[益齋 李齊賢)․임고서원[圃隱과 旅軒]․명고서원[鳴皋 鄭幹] 등 서원 4곳을 참배하면서 유학자로써 도통연원을 확인하였다. 특히 1773년경 분황사의 암자와 철불 그리고 경순왕릉전 등 문화재 정보를 제공하며, 경주 인근의 옛 지명과 옛길 복원 자료에도 도움이 된다. 이 외에도 「동경기행시」․「봉황대」․「분황사」․「숭덕전」 그리고 「유옥산기」등 경주에 관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동경을 유람한 기록-지촌 박이곤 계사년(1773) 10월 4일, 동경으로 여행을 떠났다. 낮에 무계진(武溪津:경북 고령) 입구에서 말을 갈아타고 적덕주점(赤德酒店)에서 조금 쉬었다. 저녁 무렵 비를 무릅쓰고 달성(達城)에 들어가 남문 밖에서 묵었다. … 8일, 일찍 출발했다. 바람을 만나 청경주점에서 잠시 쉬었고, 월성 경계로 들어갔다. 장차 옥산으로 향하려 했으나, 바람이 차고 심해서 마침내 하곡(霞谷) 여점에서 묵었다. 9일, 옥산서원에 들어가 회재 이언적선생의 사당에 인사드리고, 이어 계정으로 가서 독락당에서 쉬었다. 마침내 안강을 떠나 저녁에 사방(士坊) 주막에서 묵었다. 10일, 경주로 들어가 동문(東門)에서부터 남문(南門)으로 나왔다. 말을 종각 가에 매어두고 봉황대에 올라 오래도록 배회하였다. 마침내 숭덕전에 이르러 시조 박혁거세왕 사당을 봉심(奉審)하고, 오릉, 나정, 월성, 첨성대, 계림 등을 보았다. 11일, 분황사를 둘러보았다. 절에는 석탑 3층이 있는데, 이는 월씨국(月氏國:月支國)의 돌이라 하였다. 암자 안에는 철불(鐵佛)이 있는데 선덕왕이 창건하였고, 고려 숙종 때 고쳐지었다고 한다. 동쪽으로 1리쯤 나가면 경순왕릉전이 있고, 북쪽으로 1리쯤 올라가면 표암이 있는데, 이곳은 사량부 대인 이알평이 탄강(誕降)한 곳이다. 또 북쪽으로 1리를 못 가서 신라 신문왕이 건립한 백률사가 있는데, 바위 위에는 관음(觀音)의 자취가 있고, 송순(松筍)이 절 뒤에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굴석사(崛石寺)가 있는데 석불이 자못 기이하였다. 오후에 호림에서 고성주점으로 향해가서 묵었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다. 12일, 비 형세가 심하고 아직 그치지 않아 또 조금 개이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떠났다. 부슬비가 옷을 적시어 걷기가 어려웠다. 겨우 오룡동(五龍洞) 석교점에 도착해 묵었다. 북쪽으로 고성과의 거리는 겨우 1 단정(短亭)이었다. 13일, 비가 그쳤다. 안강을 출발해 익재 이제현선생의 위패를 모신 구강서원에 이르렀다. 장차 서원 안에서 묵으려 하였으나, 원임(院任)이 기질(忌疾)이 있다고 하여 떠나 옥산서원을 다시 찾았다. 양진재(兩進齋)에서 묵었다. 큰 바람이 밤새도록 세차게 불었다. 14일, 옥산에 머물며 계정을 갔다. 선생이 직접 쓴 구경연의(九經衍義) 초고와 인종대왕어찰(御札) 그리고 퇴계선생 편지를 감상하였다. 정혜사를 둘러보고자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돌아와 양진재에서 묵었다. 저녁 식사 후 동주(洞主) 이 참의(參議)가 서원에 와서 여정의 수고를 달랬는데 자못 정성스러웠다. 15일, 아침을 먹은 후 길을 떠나 하곡에서 시령을 넘어 이동주점에서 조금 쉬었다. 20일, 집으로 돌아왔다. 아! 내가 천시(天時)를 만나면 문정을 벗어나 벼슬하여 조정에 올라 임금의 은혜를 노래하고, 내가 천시를 어기면 문정으로 돌아와 은거하여 돌과 구름 자연에서 밭 갈고 시냇가 달을 낚시질하리니, 거의 선조의 뜻에 따라 남기신 가르침을 실추시키지 않음이다. 만약 산수의 취미와 풍물의 아름다움으로 이 문정에 오른다면 마땅히 스스로 얻을 것이니, 전부 기록하지 않고 다만 문미(門楣)에 문정이라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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