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빛낸 인물관》에는 신라왕경도, 신라역사 연표, 신라상징 모형물, 등이 전시돼있다. 화랑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설치되어 있다. 토함산 길목 동리⦁목월문학관과 한마당에 어울려 사는 《신라를 빛낸 인물관》은 불국사 석굴암과 연계해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된다.신라학자(新羅學者)설 총, 신라중대의 학자다.무열왕의 홀로된 요석공주인 어머니와 고승 원효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3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다. 심도 있게 연구한 유학(儒學)을 발전시켰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풀이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했다. 신문왕 시절 꽃을 의인화한 창작설화 화왕계(花王戒) 단편을 남겼다.강 수, 유학자이며 문장가이다.타고난 예지로 미천한 신분을 뛰어넘어 유교정치 이념에 공헌했다. 무열왕이 즉위할 때부터 학식을 인정받아 각종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했다. 책임감 있는 국정문서작성으로 삼국통일에도 기여했다.김대문, 진골귀족 출신의 학자이며 저술가다.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김대문의 기록들이 비친다. 저서로 『계림잡전(鷄林雜傳)』⦁『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紀)』⦁『한산기(漢山記)』⦁『약본(藥本)』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다만 화랑세기 발췌필사본이 전한다. 540년~681년까지 32명의 화랑우두머리 순으로 기록한 책이다. 신라인 ‘오기공’ 아버지가 못다 저술한 화랑세기를 아들 김대문이 681~687년 완성한 저서다.최치원, 신라 후기 대유학자로 호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다.당에서 유학하여 18세 과거에 급제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망해가는 신라를 위한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올렸다. 난세를 비관하며 유랑하다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경북 경주 초월산 숭복사비⦁경남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충남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사산비명(四山碑銘)』은 귀중한 업적이다.신라예술(新羅藝術)솔거, 통일신라시대의 화가다. 삼국사기 열전에 출생의 가계(家系))는 알 수 없으나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화가였다. 품(品)자형의 분황사 가람 왼편 금당 북쪽 벽에 솔거가 그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이 있었다.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할 만큼 영험서린 그림이었다. 황룡사 금당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살아있는 소나무로 착각한 새들이 벽에 부딪쳐 떨어질 만큼 예술 혼이 숭고했다.양지, 선덕여왕 시절 승려이며 조각예술가다.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像), 사천왕사(四天王寺)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 등이 있다. 석장사(錫杖寺)에 기거하며 벽돌에 삼천불을 새겨 봉안하였다.백결선생, 자비왕 시절 음악연주자다.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로 백번 꿰맨 옷을 입고 다녔기에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설 명절 집집마다 찧는 떡방아소리에 부인이 부러워하자 거문고 가락으로 절구통 방앗공이 소리를 내어 위로했다. 그 가락은 후세에 대악(碓樂)이란 이름으로 전했다.김생, 신라의 명필이다. 해동의 서성(書聖)이라 추앙받는 김생은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했다. 송나라에서도 왕희지 버금가는 명필로 유명하다. 복원한 월정교 남쪽문루 현판 글씨는 김생의 봉화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奉化太子師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글씨를 집자한 것이다.월명사, 35대 경덕왕 시절 승려이며 화랑이었다. 향가와 대금의 예인이다. 사천왕사에 머물면서 달 밝은 밤 대금을 불면 피리소리에 취해 가던 달도 멈추었다. 그 길을 월명리라 불린다. 일찍 죽은 누이를 위해 지은 〈제망매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뜬 재앙을 물리치려 지은 〈도솔가〉 향가가 전한다.신라효행(新羅孝行)지 은, 신라의 효녀로 전해내려 온다. 늦은 나이에도 혼인하지 않고 눈먼 홀어머니를 모셨다. 쌀 10여석에 부잣집 종이 되었다.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느 날 하는 말씀이 “예전 식사는 거칠어도 밥맛이 달았는데, 지금 식사는 좋은데도 맛이 예전 같지 않구나 무슨 일 있느냐?”하고 물었다. 지은이 사실을 말하니 모녀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소문을 들은 화랑 효종랑과 그의 낭도들이 도움을 주었고 왕도 포상하였다.손 순, 삼국유사에 전하는 효자다. 홀어머니를 섬기는 가장이였다. 어린자녀가 할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아내와 의논하여 아이를 산에 묻어버리려 땅을 파니 기이한 돌종이 나왔다. 이상히 여겨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종을 치니 궁궐까지 소리가 퍼졌다. 흥덕왕이 자초지종 사연을 듣고 지극한 효성에 상을 내렸다.향 덕, 경덕왕 때의 효자다. 나라에 흉년이 들어 향덕의 아버지가 굶주림에 병까지 들었다. 향덕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에게 먹여 병을 낫게 하였다. 효심에 감복한 마을사람들이 왕께 고하니 상으로 조 5백 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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