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신문 칼럼에 하버드 대학생의 ‘공부 비법’이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비법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바로 10일 먼저 해치우기’였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면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여유를 가지고 계속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처럼 아둔한 사람이 이 하버드생의 공부비법과 비교를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나 원고 작성 등의 일을 미리 처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점은 좀 닮은 것 같다.
치술령에 대해 원고를 작성해야 할 기한이 두어 달 여유가 있지만 신발끈을 조이고 치술령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4-5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데, 현직에 있을 때 녹동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따라 두어 차례 다녀왔다. 당시에는 그냥 친구와 어울려 등산을 한다는 생각으로 찾았었다. 이후 문화재 답사를 목적으로 울주군 만화리에 있는 박제상 유적지를 출발하여 법왕사를 거쳐 올라가고, 또 한번은 은을암 쪽으로 오른 적이 있다. 오늘은 다시 박제상 유적지를 거쳐 치술령을 오르기로 했다. 이 길 외에도 옻밭 마을에서 바로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도 있다.
치술령(鴙述嶺)은 지술령, 지실령이라고도 하는데, 외동읍의 석계리, 녹동리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765m의 고개이다. ‘치(鵄)’는 솔개를, ‘술(述)’은 수리 즉 독수리, 참수리 등 수리과의 새를 지칭하는 용어로 맹금류를 총칭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영(嶺)은 고개를 의미하니 치술령은 솔개 등의 맹금류가 살고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오래전 이 산에는 맹금류인 솔개가 많았던 것일까?
먼저 만화리에 있는 박제상 유적지를 찾았다. 울산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박제상유적지는 크게 충렬공박제상기념관과 그 뒤쪽의 박제상추모비 그리고 그 동쪽으로 치산서원이 있다. 박제상과 치술신모가 된 그의 부인을 기린 사당터에 세운 서원이다.
이곳에서 치술령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충효사를 지나 법왕사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법왕사 아래에 주차가 가능한 공간이 있으나 차량 통행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있다. 충효사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그리고 딸들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그렇게 했을 듯하고 법왕사의 ‘법왕’은 부처님을 지칭한다. 그런데 법왕사 마당에는 가운데 천수천안관음과 그 좌우로 좌상 또는 입상의 33관음상이 장관이다. 법왕사가 아니고 관음사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찰이다.
산 정상 가까이 올라서면 울산 쪽의 망부석이 있다. 주위로 널찍하게 전망대를 조성해두고 그 아래 바위 면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글자를 음각해 두었다.
울산 쪽 망부석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박제상의 부인이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치성을 드릴 때 마셨다는 ‘참새미’라는 샘터가 있다. 물은 깨끗하지만 낙엽이 수북해 그냥 마시기가 어렵다.
이곳에서 10여분 정상으로 오르면 경주 외동 쪽 망부석이다.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니 부인이 이곳에서 딸들과 함께 왜국에 간 남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 같다. 그런데 박제상 부인의 친정이 울주군 만화리이다. 남편을 그리던 부인이 바위가 되었다는 설화를 생각하면 울산 망부석이 맞을 듯하지만 실제 산을 올라보면 동해를 바라보는 위치로는 경주 망부석이 더 그럴듯하다.
이 고개 위에는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박제상 부인을 기리는 신모사지가 있다. 그리고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소가 있었다는데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이정표를 따라 4.4Km를 내려가면 은을암에 이르게 된다. 이 암자는 통도사의 말사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시대의 고찰로 알려져 있다.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남편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육신은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이 새가 되어 이곳 바위굴로 숨어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새[乙]가 숨은[隱] 곳에 자리한 암자라고 해서 은을암이라 한다.
좁은 비탈면에 요사채, 무설당, 영산전, 삼성각, 극락전, 범종각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특히 박제상의 부인이 새가 되어 깃든 곳으로 알려진 바위굴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