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평생 모은 소장품인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2만3000여 점이 연일 화제다. 이건희 컬렉션이 국민 품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각 지자체는 이 컬렉션 전시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 노력 또한 가열차다. 한편, 대구미술관에도 이건희 컬렉션 중 일부인 대구 작가 작품 21점이 기증됐다.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화가 이인성의 대표작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년)’외 7점과 이쾌대, 서동진, 한국 추상화가의 거장 유영국의 수작이 포함된 것.
이 21점 중 당시 ‘화단의 귀재’였던 이인성(1912~1950)의 환향작이 가장 많다. 특히, 이인성의 대표작인 ‘경주 산곡에서’는 당시 이인성이 경주를 수차례 방문하면서 그린 작품으로 당시 경주의 명망가 중 한 사람이었던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 1905-1980) 선생과의 인연으로 탄생됐다고 한다. 이 거장의 대표작인 ‘경주의 산곡에서’ 작품 구상과 제작 유도를 한 이가 바로 석당 선생이었던 것이다. 석당 선생과 이인성 화가와의 스토리를 ‘박물관학보(2007, 한국박물관학회)’에 실린 석당 선생의 회고를 토대로 재구성해 보았다.
-경주박물관 창설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여해 일제강점기 박물관 문화 개척과 신라문화재 보존한 석당 선생// 1935년 `경주의 산곡에서`로 선전(鮮展) 최고상 수상하면서 ‘화단의 귀재’라는 찬사 얻은 이인성 석당 최남주 선생은 우리나라 고고학계와 박물관학계의 여명기였던 1926년, 우리나라 민간문화재 보호 단체의 효시인 경주고적보존회에 첫 발을 내디딘다.
선생은 경주박물관 창설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여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박물관 문화의 개척과 신라문화재 보존과 경주를 위해 평생을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었던 이로 잘 알려져 있다. 경주의 산야와 남산의 이름 없는 골짜기에 무수히 산재한 문화재에 선생의 따스한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평생을 신라고도 경주를 지키면서 우리민족문화재 보존과 발굴에 헌신했던 이였다.
한편, 당시 ‘선전(鮮展)’으로 약칭되는 조선미술전람회는 1930년대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하고 성장하였던 미술작품 공모전이었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던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인성이 있었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후, 1929년의 8회 조선미전에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가 19세가 되던 해 ‘선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에 ‘천재소년 이인성’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한다. 23세의 나이로 조선전과 일본제국전의 모든 부분에서 특선을 휩쓴 적도 있다. 이후에도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의 입선, 총독상,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그 유명한 ‘가을 어느 날’을 출품해 특선을, 1935년 제14회전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귀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간다. 이인성은 동경에서의 고학과 탁월한 창작활동을 마치고 고향 대구로 1935년 금의환향한다.
한편, 1920년대 초부터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던 모더니즘 미술은 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화가들에게도 수용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대적 동향을 대표한 작가가 이인성이었고 세잔과 고갱의 영향을 받은 후기 인상파의 화풍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그의 ‘가을 어느날’과 ‘경주의 산곡에서’ 등은 폴 고갱의 강렬한 색채와 기법 등을 연상케한다.
-석당 최남주 선생...당대 내로라하는 이인성, 고희동, 이도영, 이한복, 오세창, 나혜석, 이쾌대, 황술조, 일본 화가 등과 교류 활발해 석당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박물관학보(2007, 한국박물관학회)’에 실린 회고 중, ‘조선 근대화단에 담겨진 신라의 혼’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1930년대 경주를 찾아 영감을 얻었던 당대의 예술가들과의 교류와 소통에 관한 기억들을 회고하면서 이인성 화가와의 인연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석당은 ‘1930년대 경주박물관에 근무할 당시 서울서 경주로 답사를 온 학자들이나 예술인들을 가끔씩 시내 요리집으로 초대해 신라 고도 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제법 격조있는 대접을 했다.
당시 명인들의 서화를 수집할 정도로 가사는 여의치 않았지만 다른 이들의 소장작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안목을 높이고 감식안을 길렀다’고 한다. 이로써 석당은 서화감상이 취미가 되었고 심미안을 가지는 계기가 된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은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 경주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신라의 역사와 신라인들이 남긴 석조 예술품들에 대해 담론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고도의 밤을 만끽했다.
자연스레 석당은 조선미술계의 동향에 대해 귀동냥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예술세계에 대해서도 경청한다. 이를 계기로 고희동, 이도영, 이한복, 오세창, 이영일 등 당대 거장들은 서울로 돌아가 석당에게 경주 답사 기념으로 작품을 한 점씩을 보내며 고마움에 답례한다.
그 외에도 서양화가 나혜석, 이인성, 심형구, 이마동, 이쾌대, 김용준, 함대훈 그리고 석당의 친구 황술조, 조각가 김복진, 윤승욱 등이 그러했다. 일본 화가 후지시마 다케치, 와다 에아사쿠, 야자와 갠재쯔, 조각가 다카무라 고타로, 시미즈 다카하시 등도 있었다.
-“경주를 방문한 많은 화가들 중에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서양화가는 한국의 고갱이라 불리는 이인성이다” 석당은 이인성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35년 봄날, 작달만한 키에 화구통을 둘러맨 청년 한 사람이 경주박물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대뜸 당시 경북고여 교장으로 있던 시라카미(白神壽吉)의 소개장을 내밀면서 “당신이 최남주요? 나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 제일의 서양화가 이인성이요”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내 나이보다 10살쯤 아래로 보이는 친구가 너무 당돌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으나 평소 신라 유물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시라카미 교장의 소개장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 소개장에는 ‘자신이 친아들처럼 아끼는 조선화단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서양화가 이인성 군이 경주의 신라유적지를 스케치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도와달라’며 말미에는 이인성과는 좋은 술벗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당시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이인성은 고향 대구로 1935년 금의환향했기에, 경주박물관에 근무하는 조선 사람인 석당을 다소 초라하게 보고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인성과 경주고적보존회 선각자이자 미술 분야 ‘딜레탕트(dilettante, 미술애호가)였던 석당은 어렵지않게 본격적인 소통을 하기에 이른다. 석당은 박물관에 진열중인 신라유물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을 해주고 오후에는 안압지와 계림, 반월성 등을 돌아서 남산이 바라보이는 문천 일정교 다리터에 앉아 이인성과 ‘약주 일배로 해갈’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멋진 고도에서의 석양배(夕陽杯)였다. 석당은 이윽고 이인성에게 신라인들의 뛰어난 미의식과 예술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신라 천년 혼이 내재된 경주를 소재로 한 작품을 권유하게 된다. 니체가 아테네를 동경한 것에 비유하며 이인성의 솜씨는 신라의 영혼과 조화를 이뤄 불후의 명작이 탄생할 것이라 하면서...,
-불후의 명작 ‘경주의 산곡에서’...일제강점기 신라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역사속의 민족적 리얼리티 구현한 대작 거장다운 자질의 소유자였던 이인성은 역사관과 예술관이 내재되어 있었고 ‘내 몸속에도 신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솔거 이후에 후세 길이 남을 만한 대작을 구상해 보겠다’고 한다. 문천 냇가에서 시작된 석양배는 동서고금의 예술론과 역사론으로 이어졌고 고도의 봄밤은 깊어만 간다. 석굴암과 불국사, 남산의 석조마애조각상들을 함께 답사를 하니, 이인성의 신라미술에 대한 감정은 아름다운 화폭으로 성화되어 간다.
이인성은 경주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며 스케치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는 석당에게서 들은 경주답사여정 이야기를 수첩에 기록한다. ‘경주의 산곡에서’가 완성되기까지 모두 5차례 경주를 더 방문하며 신라의 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온몸으로 신라의 미를 느끼면서 영감을 얻어 표현한다. 바로 1935년 이인성의 나이 23세때, 14회 조선미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은 불후의 명작 ‘경주의 산곡에서’를 탄생시킨 이야기다.
석당은 ‘혹자들은 이 작품을 일본에서 제작해 출품했다고 하나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경주의 산곡에서’는 이인성 회화의 대표작이다. 이는 분명히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신라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역사속의 민족적 리얼리티를 구현한 대작이다. 화면 중앙에 포치(布置)된 경주산골의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맑은 영혼을 가진 내면의 세계로 표현되었고 멀리 남산과 반월성, 첨성대, 들판에 뒹구는 신라 와당들은 조화롭게 붉은 색조를 띤 설화의 내용을 형상화 시켰던 것이다’라고 썼다.
석당은 ‘이인성이 남긴 여러 작품 중에 ‘경주의 산곡에서’야 말로 식민지의 비애와 신라의 미적 영감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회고했다.
해방 이후, 이인성은 서울로 이사했고 해마다 석당에게 연하장을 보내며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 후 소식이 두절돼 궁금하던 차에 한국전쟁 이후 심형구 화백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이인성이 한국전쟁 중 경찰관과 취중에 언쟁을 하다 돌연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석당은 ‘인생은 무상하고 그가 남긴 예술만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나의 우거(寓居) 사랑에 걸려있는 이인성이 그려준 그림 한 폭을 통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