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부 남천을 휘감아 흐르는 문천(汶川:蚊川)에 ‘문정(汶亭)’이란 이름을 내세운 정자가 시대별로 존재하였고, 동도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문천 가에 세워진 정자는 선비의 휴식처이자 유생들의 학습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고려말 전녹생(田祿生,1318~1375)의 『야은일고(壄隱逸稿)』「계림동정(雞林東亭)」을 통해 계림의 동정이 확인된다. 『야은일고』는 1714년경 후손 전만영(田萬英)이 흩어져 있는 선대의 자료를 모아 편차(編次)하였기에, 1530년에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경주의 동정은 부(府)의 동남쪽 5리에 있다고 전한다.
조선에 이르러 유생들이 강학하던 남천의 사마소는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영귀정(詠歸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등 문천 가에 세워진 수많은 정자의 흔적은 문헌을 통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조선중기 김해김씨 문옹(汶翁) 김석견(金石堅, 1546~1614) 역시 1565년 경주 남쪽 동정리(東亭里) 문천 가에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문옹선생은 경주부 동정리(東亭里)에서 태어났으며, 충직한 성품이 있었다. 젊은 시절 문정을 짓고 여러 문인들과 회합과 교분을 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첫째 김몽수(金夢秀)⋅셋째 김몽남(金夢南) 두 아들과 지역민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이후 둘째 김몽양(金夢良) 역시 모친의 권유로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내남면 노곡리 곽천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집안 모두가 의병에 동참하였다.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의 신하 가운데 무기를 버리고 달아난 자가 많았고, 오히려 초야의 신하 가운데 몽둥이를 들고 호통친 자 역시 많았다. 이는 오직 그 사람의 충의(忠義)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니, 그 지위가 있고 없고를 두고 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초야의 충신과 의사가 영남지방보다 성대한 곳이 없었고, 특히 경주부는 적이 다니는 길목에 닿아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훈련원 정 김석견 공 역시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평소 국가에 깊은 은혜와 작은 벼슬조차 없었지만, 오직 아는 것이라고는 임금과 신하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도리뿐이었으니, 임금과 부모의 위급함을 당해 충의를 일으켜 스스로 분발함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이후 1578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양북면 두산별장(斗山別庄)으로 거처를 옮겼고, 농사 짓고 후학 가르치며 산림처사로 평생을 지냈다.
훗날 후학들이 1798년 두산사(斗山祠)를 창건해 넋을 기렸는데,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 문옹사(汶翁祠) 상량문을,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1739~1822)이 두산사 봉안문을,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가 문옹사당기 등을 지었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와 맑은 남천의 물줄기가 빼어난 풍광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탄성과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듯, 예전 남천 가에 식재된 수종을 연구하고 가꾸면서 조선시대 세워졌던 정자들이 복원되어 좋은 볼거리로 제공되길 희망한다. 문정기(汶亭記)-김석견 동도(東都)의 문수(汶水) 가에 내 비로소 독서와 강의하는 몇 칸의 집을 짓고 처음에는 천관거사(川觀居士), 문옹(汶翁) 이라 이름하였다. 선대는 대대로 장단(長湍)에서 살았고, 조부 도정부군(都正府君) 김자문(金自文)께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기상이 호방하여 세속에 마음이 맞지 않아 급변하는 세류에 용감히 물러나 오호(五湖)에 편주 띄우듯 벼슬을 버리고 호연히 남쪽으로 내려와 동도의 문수 가에 머물렀다. 공을 그리워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반드시 문수 가에 있는 의미이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았는데, 비록 강호에서 불우한 처지로 진퇴의 근심이 없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곳에 정자를 지어 시를 읊조리고 노닐며 휴식하니, 사람이 그 땅을 얻고, 땅이 그 사람을 얻었으니, 또한 우연이 아니라 각각 그 때가 맞았다고 하겠다.
아! 내가 천시(天時)를 만나면 문정을 벗어나 벼슬하여 조정에 올라 임금의 은혜를 노래하고, 내가 천시를 어기면 문정으로 돌아와 은거하여 돌과 구름 자연에서 밭 갈고 시냇가 달을 낚시질하리니, 거의 선조의 뜻에 따라 남기신 가르침을 실추시키지 않음이다. 만약 산수의 취미와 풍물의 아름다움으로 이 문정에 오른다면 마땅히 스스로 얻을 것이니, 전부 기록하지 않고 다만 문미(門楣)에 문정이라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