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 이후 처리 문제로 일본에 건너간 사명대사가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시를 주고 받았다(서울 성북구에 있는 우리옛돌박물관에 이 시를 볼 수 있다.)
이에야스가 사명대사에게 먼저 공격을 하였다.石上難生草(석상난생초) 돌 위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房中難起雲(방중난기운)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거늘汝爾何山鳥(여이하산조) 너는 도대체 어느 산의 새이기에來參鳳凰群(내참봉황군)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는가. 당시 조선과 일본은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한문은 같이 썼기 때문에 필담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사명이 맞받아쳤다.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노닐다가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하루아침에 구름과 안개가 사라져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잘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사명대사의 통 큰 배짱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의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이에야스와의 통쾌한 문답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를 대하니 신라 충신 박제상이 생각난다. 과거 필자는 그가 박씨 성을 가진 재상(宰相) 벼슬을 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실제 남산신성비에 의해 제상(堤上)이라는 벼슬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박제상은 박씨 성을 가진 제상(宰相)은 아니지만 제상(堤上) 벼슬의 인물일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인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기전체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이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는 이보다 100여 년 후인 1280년대에 일연이 정사에는 없는 유문(遺文)과 일사(逸事)를 바탕으로 찬술한 편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 이를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고 한다. 김부식과 일연은 출신 배경 등으로 역사를 보는 프레임이 달랐던 것이다. 또 시간적으로도 100여 년 이상의 차이가 있어 두 역사서의 기술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어느 한쪽을 오류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서에서는 먼저 주인공의 성씨를 달리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박제상을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 이사금의 5세 손이라고 하여 박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왕력」편에 조의 명칭을 ‘내물왕과 김제상’이라 하여 김씨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이 기록이 단순히 오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박제상이 부계(父系)를 따르면 박씨가 되고 모계(母系)를 따르면 김씨가 되는 모계 사회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두 기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실성왕 때 왜왕의 요구로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고 10년 후 고구려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로 요구하여 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볼모가 아니고 화친을 위해 내물왕 때 왕의 셋째 아들 미해를 고구려에 보내고, 눌지왕 때 왕의 아우(내물왕의 아들) 보해를 왜에 보냈다고 하였다. 이들을 보낸 이유, 시기, 그 대상의 이름이 모두 다르다.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 고구려 왕을 설득하여 쉽게 볼모가 풀렸으나 『삼국유사』에는 미사흔과 박제상이 함께 탈출한 것으로, 또 왜에서는 처음 박제상을 회유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잔인하게 고문을 한 후 처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이 더 구체적이다.
치술령을 찾기 전 먼저 망덕사지 남쪽의 벌지지를 찾았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제상이 고구려에 이어 또 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부인이 쫓아갔으나 따라 잡지 못해 이곳 모래밭에 누워 오래도록 목놓아 울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이후 이 모래밭을 장사(長沙)라 부르고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고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 땅 이름을 벌지지라 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