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영화관을 나와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한 명은 사장님 같고 한 명은 직원 같기도 한아주머니 두 분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슬픈 일이 있었는지임대료가 턱없이 올랐는지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다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다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우리 사랑은 왜 여기까지인지집까지 걷기로 한다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다 -세상 제일 크고 막막한 사건, 좋아하는 식당이 문을 닫는 일 직장 인근에 ‘비학산 생칼국수’란 간판을 내건 식당이 있었다. 주문하고 15분쯤 뒤에 나오는 그 칼국수. 바지락과 함께 끓인 면발 뿌연 국물 위에 송송 썰어놓은 파와 청양고추, 뿌려진 김 가루, 작은 항아리에 담긴 벌건 김치와 함께 바지락 껍데기를 젓가락으로 건져내면서 씹던 후련한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기다리는 그 시간에 주방에서 건너오는 냄새와 옆자리 손님의 표정이 벌써 입맛을 당겨 사람들이 줄을 잇곤 했다. 매일 바지락을 씻고 모래를 빼내는 일이 힘겨웠나, 십 수 년을 번창하던 그 집이 문을 닫아버린 허전함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그렇다. 좋아하는 식당이 문을 닫는 만큼의 큰 사건도 우리에겐 자주 없는 일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맛이 사라졌으니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는 건 어쩜 자연스런 일.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라고 해서 과장이 지나쳤다고만 말하지 말라. 그건 방금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다룬 영화를 보고 나왔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에겐 “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우리 사랑은 왜 여기까지인지”라는 한탄을 자아낼 만큼 연인 이상의 감정이다. 그 맛을 떠나보내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아주머니 두 분의 얼굴이며 사정, 그 시시콜콜한 개인사까지가 아련하다. 그 집과의 연애가 끝난 그 허전을 달래기 위해 시인은 드디어 집까지 걸어가면서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다” 시인은 드디어 칼국숫집의, 들리지 않지만 다정하고도 안쓰러운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구나. 봄밤에 우리의 미각을 떠올려주는 한 편의 시를 읽으며 자신을 떠나버린 아련한 맛을 떠올려보는 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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