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경주판관을 지낸 박의장(朴毅長,1555~1615)은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을 도와 경주성 탈환 작전에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공을 인정받아 경주부윤이 되었다. 갈암 이현일은 학사 김응조의 비명(碑銘) 뒤에 기록하길 “1592년 9월 7일, 박의장 공이 친히 결사대를 이끌고 곧바로 성 아래로 접근하여 비격진천뢰를 써서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매우 많아 놀라서 밤중에 도망쳤다. 군대를 정비하여 성에 들어가니, 획득한 곡식이 모두 4만 석이나 되었다. 이때부터 이리저리 오가면서 유격병을 풀어서 요충지를 차단하니, 영천(永川)과 신령(新寧)의 도로가 비로소 소통된 것이 이때부터다” 그리고 선조실록 25년 임진년(1592) 9월 1일(정사) 기록을 보면,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은 무기인 줄 모르고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명이었는데, 온 진 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전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주부윤 윤인함은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조정에서는 박진을 보내 동도(東都)를 수복(收復)하려 하였다. 당시 영남은 제일 먼저 적에게 점령되어 모든 소식이 두절 되었고, 낙동강에 인접한 여러 지역들 역시 이미 적의 소굴이 되는 등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비격진천뢰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지고,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한다.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뭉치가 무겁고 운반이 어려워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자모포(子母砲)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만든 비호자모포(飛虎子母砲) 그리고 찬죽포(攢竹砲) 등이 진천뢰와 유사한 화포무기로 전하고, 조선의 유성룡(1542~1607), 정탁(鄭琢,1526~1605) 등은 활보다 살상력이 큰 화포의 사용을 주장하였다. 특히 정탁은 명나라 유생 호환(胡煥)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무릇 화살의 힘은 철환에 비교하면 4분의 2가 모자라니 서로 감당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본국의 편전(片箭)은 멀리서 쏘는 것에 장점을 지니고 있는데, 30ㆍ40보 밖에서는 두 명을 죽이고 수십에서 백 보 밖에서는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며, 100여보나 200보에서도 사람을 맞혀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적의 철환 또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국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아 거자(擧子) 이외에는 능한 사람이 너무 적어서 오로지 이 기술로만 적을 제압하는 상도(常道)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상국(명)엔 화전(火箭)의 기구가 지극히 신묘하니 귀신도 달아나지 못할 것입니다”며 화포 활용을 주장하였다. 경주 의병장 동엄(東广) 김득복(金得福,1561~1626)의 『동엄실기』에 「비격진천뢰철환영(飛擊震天雷鐵丸影)」이 실려 있다. 당시 경주성을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주변 고을과 협력해 경주성을 탈환하면서 진천뢰를 활용해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경주에서 직접 주조한 비격진천뢰와 소중한 사료의 연구와 시대적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득복은 경주성 수복전투를 기억하기 위해 그림과 내력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격진천뢰철환영(飛擊震天雷鐵丸影) - 김득복『송기(宋紀)』를 살펴보면, “금나라 사람이 만든 화포를 진천뢰(震天雷)라 한다. 쇠 두레박[철관(鐵罐)]에 화약을 가득 넣고 공[환(丸)]처럼 만들어 불을 붙이면 폭발하며,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고 하였다. 조선 군기시(軍器寺) 이장손이 만들었고, 경주성을 되찾을 때 그 제도로 인하여 주조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화포제작법이 전하지 않아 안타깝다. 오로지 이 철환(鐵丸)만이 후손에게 전해져 경주성 수복 때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운 의리를 징험하기에 충분하므로, 문집의 뒷부분에 글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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