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는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계에도 있다. 현상을 바꾸려는 진보와 유지하려는 보수는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런데 당시엔 무엇이 ‘현상’이었을까? 고전파까지 음악은 대체로 절대음악이었다. 즉,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교향곡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음(音)일 뿐이다. 이것이 19세기 전반까지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진보에게 음악은 그냥 음(音)일 수 없다. 음악에는 무언가 내용이 있다. 그것은 문학일 수도, 애인에 대한 연모일 수도 있다. 문학을 오페라로 만들고, 연모를 교향곡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표제음악이다.
표제음악으로 상징되는 진보그룹의 어르신 역할은 리스트(Franz Liszt/1811-1886)가 맡았다. 하지만 실세는 훗날 그의 사위가 된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1813-1883)였다. 이들은 리스트의 ‘교향시’와 바그너의 ‘음악극’을 옹호했다. 교향시에는 시(詩)가 들어 있고, 음악극에는 극(劇)이 들어있다. 바그너는 “절대음악은 공허한 음의 울림에 불과할 뿐!”이라 하며 절대음악을 맹폭했고, “음악이 본질적으로 출현하려면 극적·시적 모티브를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교향시나 음악극이 아닌 장르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한편, 진보그룹과 대척점에 서는 보수그룹은 빈(Wien) 고전주의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신고전파는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1809-1847)이라는 젊은 리더를 너무 일찍 잃었다. 이후 수장을 잃은 보수그룹은 바그너의 날선 공격을 받아오다가 드디어 새로운 리더를 옹립하게 된다. 바로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다. 당시 보수를 대표하던 비평가 한슬리크(Eduard Hanslick/1825-1904)는 브람스 음악에서 고전파의 이상을 찾았고, 보수 대 진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논쟁을 격발시켰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교향곡은 종말을 고했다”라고 단언했다. 이는 절대음악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브람스는 1876년, 43세의 나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여 절대음악의 맥을 이었다. 세계 최초의 전문 지휘자로 알려진 뷜로(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1830-1894)는 고전파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로 브람스의 1번 교향곡을 ‘10번 교향곡’이라 칭했다. 바하, 베토벤을 잇는 세 번째 B로 브람스를 인정한 것이다. 최고의 칭찬이 아닐 수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뷜로가 리스트의 사위였으나 그의 아내 코지마를 바그너에게 뺏긴 후 보수에서 진보진영으로 돌아선 인물이라는 것이다. 바그너에겐 세 번째 B가 브루크너였을 터이니 말이다.
브람스파(보수)와 바그너파(진보)의 논쟁은 살벌했지만, 브람스는 바그너를 크게 비난하지는 않았다. 나이 차(바그너가 브람스보다 20살 연상)가 있었고, 바그너를 존경하는 구석이 있었고, 분야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브람스는 바그너파의 일원이었던 브루크너(Anton Bruckner/1824-1896)에게만큼은 관대하지 않았다. 브루크너는 브람스처럼 교향곡 작곡가였기 때문이었다. 3번째 B가 되기 위한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양 진영의 핵심 멤버들이 죽어가는 시점부터다. 오늘날에도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은 공존한다. 과거처럼 어떤 것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는 알 수 없다. 음이 중요하냐 아니면 내용이 중요하냐는 사실 음악의 소비자 입장에서는 취향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건전한 음악 생태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